왕과 사는 남자 스틸컷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마침내 1000만 관객 고지에 올랐다. 배급사 쇼박스와 주요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 작품은 3월 6일 오후 6시 30분 기준 누적 관객 1000만명을 돌파했다. 역대 국내 개봉작 가운데 34번째 천만 영화이며, 한국영화로는 25번째 기록이다. 사극 장르만 놓고 보면 ‘왕의 남자’, ‘광해, 왕이 된 남자’, ‘명량’에 이어 네 번째 천만 사극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작지 않다.
‘왕과 사는 남자’의 천만 돌파는 단순한 흥행 뉴스로 끝나지 않는다. 최근 몇 년간 한국 극장가는 팬데믹 이후 회복 지연, 관객의 OTT 이동, 대작 편중 심화라는 삼중 부담을 안고 있었다. 그런 시장에서 다시 천만 영화가 등장했다는 사실은, 한 편의 성공을 넘어 극장 산업 전체가 아직 완전히 힘을 잃지 않았다는 신호로 읽힌다. 국내 개봉작의 천만 돌파는 약 2년 만이다.
실미도 스틸컷
한국영화에서 ‘천만 관객’이 상징이 된 출발점은 2003년 ‘실미도’였다. ‘실미도’는 한국영화 최초의 천만 영화로 기록되며, 한국 상업영화도 전국 단위 대중 흥행에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맞설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시장에 심어줬다. 이어 2004년 ‘태극기 휘날리며’가 곧바로 천만을 넘기면서, 천만 영화는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한국영화 산업화의 새 단계라는 인식이 굳어졌다. 영화진흥위원회 계열 자료들도 이 시기를 한국영화 도약의 결정적 분기점으로 짚고 있다.
이후 천만 영화는 한국영화의 외연을 넓히는 지표가 됐다. ‘왕의 남자’는 사극도 폭넓은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음을 증명했고, ‘괴물’은 장르영화의 확장성을 보여줬다. ‘해운대’는 재난영화의 가능성을 열었고, ‘광해, 왕이 된 남자’는 사극의 시장성을 다시 확인시켰다. 2010년대 들어서는 ‘7번방의 선물’, ‘변호인’, ‘명량’, ‘국제시장’, ‘베테랑’, ‘부산행’, ‘택시운전사’, ‘신과함께’, ‘극한직업’ 등 다양한 장르와 정서의 영화들이 천만을 넘기며, 천만 영화가 특정 장르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줬다. 이러한 흐름은 천만이 단지 숫자가 아니라, 한국 대중문화의 집단적 선택을 드러내는 상징이 됐음을 의미한다.
신과 함꼐 스틸컷
한동안 천만 영화는 일종의 ‘국민 이벤트’처럼 작동했다. 멀티플렉스 확대, 가족 단위 관람 문화, 연휴 효과, 입소문과 재관람이 결합하면서 한 작품이 세대와 지역을 넘어 폭넓게 소비되는 구조가 형성됐다. 이 시기의 천만은 흥행 성적표인 동시에, 그 시대 대중의 감정과 관심이 어디에 모였는지를 보여주는 문화적 사건에 가까웠다. 영화가 사회적 대화의 중심에 서고, 극장이 모두가 같은 장면을 함께 목격하는 공간으로 기능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과거의 천만은 산업 성장의 상징이었다. 스크린 수가 늘고, 배급 시스템이 정교해지고, 한국영화에 대한 신뢰가 높아질수록 천만 영화도 꾸준히 등장했다. 천만은 “정말 대단한 기록”이면서도, 동시에 성장하는 극장 시장 안에서는 반복 가능성이 있는 목표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다시 말해 과거의 천만은 불가능의 숫자라기보다, 잘 만든 대중영화라면 도전해볼 수 있는 최상위 기록에 가까웠다.
범죄도시 스틸컷
그러나 지금의 천만은 분명히 다르다. 영화진흥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2024년 전체 극장 관객 수는 1억2313만 명으로 전년보다 1.6% 줄었고, 매출 역시 1조1945억 원으로 감소했다. 2025년에는 상황이 더 녹록지 않았다는 진단도 이어졌다. KOFIC 웹매거진은 2025년 극장 총관객 수가 약 1억600만 명 수준으로 예상된다고 전했고, 상반기 관객 수는 전년 동기 대비 32.5% 줄었다고 분석했다. 시장 전체 파이가 줄어든 상황에서 천만을 달성한다는 것은 예전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이 변화의 중심에는 OTT가 있다. 영화진흥위원회 자료를 보면 극장 관람이 줄어든 이유로 많은 관객이 “상영 종료 후 OTT나 IPTV로 보는 것이 더 편리하다”고 답했고, 극장 외 영화 관람 방식 가운데 OTT 만족도는 83.6%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이는 관객이 영화를 소비하는 기본 플랫폼이 이미 극장만이 아니게 됐다는 뜻이다. 이제 사람들은 반드시 극장에 가야만 영화를 볼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지 않다. 집, 모바일, 태블릿, 스마트TV가 모두 경쟁 상영관이 된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OTT 시대의 천만은 단순한 흥행 성적이 아니라, ‘그래도 이 영화는 극장에서 봐야 한다’는 집단적 합의를 이끌어낸 기록으로 봐야 한다. 과거의 천만이 성장 시장의 산물이었다면, 지금의 천만은 선택지가 무한히 많아진 시대에 관객의 시간과 비용, 관심을 다시 극장으로 끌어온 결과다. 같은 1000만명이라도, 그 안에 담긴 설득의 강도와 상징성은 훨씬 무거워졌다고 할 수 있다.
왕과 사는 남자 스틸컷
이런 맥락에서 ‘왕과 사는 남자’의 천만 돌파는 특별하다. 이 작품은 단종이라는 역사적 소재, 유해진과 박지훈의 연기, 정통 사극의 정서, 입소문을 탄 감정선이 맞물리며 폭넓은 관객층을 끌어모았다. 특히 자극적 설정보다 따뜻한 서사와 감정의 잔향으로 관객을 모았다는 점은, 최근 극장가에서 보기 드문 흥행 방식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연합뉴스도 이 작품의 흥행 요인으로 배우들의 열연과 따뜻한 서사에 대한 호평을 짚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영화가 던진 메시지다. OTT 시대에도 극장은 여전히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점, 다만 예전처럼 자동으로 관객이 모이는 공간은 아니라는 점이다. 관객은 이제 훨씬 더 까다롭게 작품을 고른다. 집에서 봐도 되는 콘텐츠와 극장에서 꼭 봐야 하는 콘텐츠를 구분한다. 그런 시대에 천만을 달성했다는 것은, ‘왕과 사는 남자’가 단순히 많이 본 영화가 아니라 관객에게 극장 관람의 이유를 제공한 영화였다는 뜻이다.
천만의 역사는 계속되지만, 천만의 조건은 달라졌다
한국영화 천만 돌파의 역사는 곧 한국영화 산업의 성장사였다.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가 문을 열었고, ‘왕의 남자’와 ‘괴물’, ‘명량’과 ‘국제시장’, ‘극한직업’과 ‘서울의 봄’, ‘파묘’와 ‘범죄도시4’가 그 역사를 이어왔다. 그리고 이제 ‘왕과 사는 남자’가 그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다만 오늘의 천만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은 공식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시장은 더 작아졌고, 관객은 더 분산됐으며, 극장은 더 치열한 선택의 공간이 됐다.
그래서 ‘왕과 사는 남자’의 천만은 단순히 또 하나의 기록 추가가 아니다. 그것은 OTT 시대에도 한국영화가 여전히 ‘함께 보는 경험’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 사건이다. 천만의 시대가 끝난 것이 아니라, 훨씬 더 어려운 조건 속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다시 쓰이고 있다는 점을 이 영화가 보여줬다. 숫자는 같지만, 그 숫자가 품은 무게는 예전보다 더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