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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한글 창제를 스릴러처럼 읽다…김진명의 『세종의 나라』
  • 서지원 문화 & 전시 전문기자
  • 등록 2026-03-31 16:4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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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애소설처럼 시작해 한글 창제의 정치학으로 나아가다
  • 사대와 자주, 기득권과 애민이 충돌하는 훈민정음의 서사
  • 세종의 업적을 기념이 아닌 사건의 리듬으로 복원한 작품


사대의 질서와 맞선 문자 혁명…김진명, ‘세종의 나라’로 한글 창제를 스릴러 영화처럼 다시 쓰다

김진명의 새 장편소설 『세종의 나라』는 훈민정음 창제를 교과서 속 위인담이 아니라 권력과 사랑, 음모가 뒤엉킨 거대한 사건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이타북스에서 2권짜리 양장본으로 지난 2월 24일 출간됐으며,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로 1993년 데뷔한 김진명이 3년 만에 내놓은 신작 장편이기도 하다. 출판계가 이 작품을 ‘팩트와 픽션을 넘나드는 역사소설’로 소개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한글의 탄생을 이미 완성된 문화유산이 아니라, 끝내 밀어붙여야 했던 위험한 결단의 과정으로 복원해냈기 때문이다.


왕의 업적이 아니라, 사건의 속도로 읽히는 세종

이 소설의 흥미는 세종을 곧바로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 작품은 금부도사 한석리와 권숙현의 서사를 축으로 삼아, 한글 창제라는 거대한 역사적 의제를 연애소설과 추적극의 리듬 속에 밀어 넣는다. 실제로 출판사 소개 역시 한석리가 세종의 밀명을 받아 움직이는 인물이고, 권숙현이 제국의 폭압 속에서 사랑과 조국을 지키려는 인물이라고 설명한다. 김진명 자신도 최근 인터뷰에서 한글 창제를 다룬 소설은 자칫 딱딱해질 수 있어 독자를 깊숙이 끌어들이기 위한 장치로 로맨스를 활용했다고 밝혔다. 무거운 소재를 대중소설의 문법으로 번역해내는 그의 장기가 이번에도 가장 먼저 작동하는 셈이다.



한글을 둘러싼 싸움을 ‘문자’가 아닌 ‘권력’의 문제로 번역하다

『세종의 나라』의 핵심은 한글을 아름다운 문화유산으로만 다루지 않는다는 점이다. 작품은 문자를 둘러싼 싸움을 곧 권력을 둘러싼 싸움으로 읽어낸다. 국립한글박물관 설명에 따르면 세종의 한글 창제는 글을 몰라 억울한 일을 당하던 백성을 위한 애민 정신, 중국과 다른 우리만의 글자가 필요하다는 자주 정신, 실생활에 쓰여야 한다는 실용 정신을 바탕으로 이뤄졌다. 김진명은 바로 이 지점을 정치소설적으로 밀어붙인다. 그가 인터뷰에서 한글 창제를 “조선의 권력 구조를 바꾸는 혁명”이라고 규정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글자를 독점한 기득권과 이를 백성에게 돌려주려는 왕의 충돌이라는 해석은, 이 소설이 단순한 역사 재현보다 훨씬 더 현재적인 질문을 품고 있음을 보여준다.


장영실과 직선획, 팩션이 감행한 대담한 상상력

작품의 또 다른 특징은 한글 창제 원리를 둘러싼 과학적 상상력이다. 김진명은 한글의 우수성을 직선 획과 단순한 기호의 결합에서 오는 무한한 조합 가능성으로 파악했고, 그 관점이 작품 속 장면들에도 반영돼 있다. 특히 장영실을 한글 창제 과정에 깊숙이 끌어들이는 설정은 이 소설의 가장 대담한 팩션적 장치다. 작가 스스로도 역사 기록상 장영실이 한글 창제에 참여했다는 직접 근거는 없다고 인정하면서도, 한글에 과학적·수학적 측면이 중요하게 작용했다는 점에서 충분히 상상 가능한 연결이라고 설명했다. 역사적 빈틈을 모험적으로 메우는 이 대목은 엄밀한 실증보다 서사의 설득을 택한 선택이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세종의 창제가 ‘추상적 위업’이 아니라 손으로 만져지는 연구와 설계의 과정처럼 다가온다.



김진명식 페이지터너의 힘, 그리고 단선적인 대립

무엇보다 『세종의 나라』는 잘 읽힌다. 김진명의 소설은 늘 그렇듯 문제의식을 전면에 내걸면서도, 독자를 먼저 붙드는 것은 서사의 속도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이후 그가 축적해온 장편 서사의 추진력, 미스터리의 배치, 후반부에 회수되는 복선의 감각이 이번 작품에서도 유효하다. 다만 그만큼 대립 구도는 선명하다. 세종과 백성, 실용과 자주가 한 축을 이루고, 사대와 기득권이 다른 축을 이루면서 갈등이 비교적 단선적으로 정리되는 순간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 단순화는 약점인 동시에 전략이기도 하다. 김진명은 원래 사상의 미묘한 그라데이션보다, 독자가 단숨에 붙들리는 큰 서사의 전선을 만드는 데 능한 작가이기 때문이다. 그의 소설이 오랫동안 넓은 독자층을 확보해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세종의 나라’라는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훈민정음은 세종이 1443년에 완성하고 1446년에 반포한 문자이며, 해례본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그러나 『세종의 나라』가 다시 묻는 것은 연도와 업적의 크기가 아니다. 문자란 누구의 것인가, 나라는 누구의 언어로 서야 하는가, 백성에게 글자를 준다는 것은 단지 편의를 제공하는 일인가 아니면 권력의 배분을 다시 쓰는 일인가 하는 질문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세종을 기념하는 소설이기보다, 세종이 감행한 결단의 정치성을 오늘의 독자 앞에 다시 꺼내놓는 소설에 가깝다. 한글을 매일 쓰면서도 그 탄생의 위기와 긴장을 잊고 있던 독자라면, 이 소설은 익숙한 문자를 다시 낯설게 바라보게 만드는 드문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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