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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조 모인 퇴직연금, 물가도 못 이긴다.. 10년 수익률은 겨우 2%
  • 전소연 경제 전문기자
  • 등록 2025-11-24 08:4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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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아서 까먹는 내 퇴직연금… 어쩌면 좋을까?

퇴직연금이 ‘노후 안전판’이 아니라 ‘앉아서 까먹는 통장’이 되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제도 도입 20여 년 만에 적립금은 400조원을 훌쩍 넘겼지만, 최근 10년 평균 수익률은 여전히 연 2% 남짓에 그친다. 같은 기간 물가상승률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 10년 연 2%… 물가도 못 이기는 퇴직연금

국민연금연구원이 지난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국내 퇴직연금의 연평균 운용수익률은 2.07%에 그쳤다. 같은 기간 소비자물가상승률(2.20%)보다도 낮다. 겉으로는 ‘연금’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실질 구매력 기준으로 보면 사실상 제자리걸음을 한 셈이다.

적립금 규모만 놓고 보면 이야기는 다르다. 고용노동부와 금융감독원이 집계한 ‘2024년 퇴직연금 투자 백서’에 따르면 2024년 말 기준 퇴직연금 적립금은 431조7000억원. 제도 도입 이후 처음 400조원을 돌파했고, 최근 3년 연속 약 13% 안팎의 증가세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 1년 수익률만 놓고 보면 4.77%로, 두 해 연속 물가와 정기예금 금리를 웃도는 성적표도 받았다.

문제는 이런 ‘한 해 성적’이 아니라 장기 성적표다. 퇴직연금은 20년, 30년을 전제로 설계된 제도다. 10년 평균이 연 2%라면, 퇴직 시점에 손에 쥐는 돈의 실질 가치는 물가를 감안했을 때 생각보다 크게 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숫자는 늘어도, 노후에 체감할 수 있는 ‘생활 가능 금액’은 기대에 한참 못 미칠 수밖에 없다.


◇ 원리금보장형 쏠림과 ‘잃지 않으려는 문화’

수익률이 낮은 원인은 비교적 분명하다. 첫 번째는 원리금보장형 쏠림이다. 국민연금연구원이 올해 다시 정리한 자료를 보면, 사전지정운용제도(디폴트옵션) 도입 이후에도 지정 가입자의 88.1%가 여전히 예·적금, 보험 등 원리금보장형 상품을 선택한 것으로 나타났다. 제도는 바뀌었지만, 가입자와 사업자 모두 ‘손실이 날 수 있는 상품’에 대해서는 발을 빼고 있다는 얘기다.

둘째는 계좌의 ‘방치’다. 많은 근로자가 퇴직연금 상품을 한 번 가입한 뒤 그 존재를 잊고 지낸다. 사업자가 제시하는 기본 상품에 그대로 남겨둔 채, 경제 환경이 어떻게 바뀌든 포트폴리오는 거의 손대지 않는다. 최근 2024년 기준 수익률 분포를 보면 가입자의 상당수가 연 2~4% 구간에 몰려 있는데, 이는 안전자산 위주로 충성(?)을 다한 결과이기도 하다.

전문가들은 이 현상의 배경에 한국 특유의 ‘잃지 않으려는 문화’가 깔려 있다고 진단한다. 기업의 최고재무책임자(CFO)는 “퇴직연금 운용 성적이 조금이라도 마이너스를 기록하면 곧바로 ‘직원 돈을 갖고 왜 위험하게 굴렸느냐’는 항의를 받는다”고 털어놓는다. 근로자 역시 “이 돈은 내 노후 밥줄”이라는 인식이 강해, 예금 금리 수준 수익률에도 만족하고 더 이상의 위험 감수에는 선을 긋는 경향이 뚜렷하다.



◇ 물가보다 높은 수익률… ‘연금’이 되려면

감독당국도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다. 금융감독원과 보험연구원 등이 정리한 자료를 보면, 정책 당국은 퇴직연금 상품이 “인플레이션보다 높은 수익률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제시하고 있다. 단순히 원금을 지키는 수준을 넘어, 최소한 물가를 따라잡고 그 이상을 달성해야 비로소 ‘연금’으로서 제 기능을 한다는 인식이다.

이를 위해 첫 번째로 거론되는 해법은 자산배분의 정상화다. 적립금의 일정 비율을 국내외 채권, 우량 주식, ETF, 타깃데이트펀드(TDF) 등 장기투자에 적합한 상품에 자동 배분하는 구조를 강화하는 것이다. 디폴트옵션을 ‘반쪽짜리 제도’에 머물게 할 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위험 수준에서 장기 분산투자가 이뤄지도록 설계와 교육을 동시에 손보자는 제안이 나온다.

둘째 해법은 ‘기금형’ 논의다. 회사별·개인별로 쪼개져 있는 자금을 하나의 기금으로 모아, 국민연금처럼 전문 운용조직이 장기·분산투자를 수행하는 방식이다. 찬반이 엇갈리지만, 10년 평균 2%대 수익률로는 지금 구조의 한계가 분명하다는 점에서 “운용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꿀 시점”이라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 ‘연금답게’ 만들 것인가, ‘예금통장’으로 남겨둘 것인가

요즘 퇴직연금 시장에는 미세한 변화의 신호도 감지된다. 2024년 말 기준 실적배당형 상품(펀드·ETF 등)에 들어간 적립금은 75조2000억원으로, 1년 새 53.3% 늘었다. 일부 증권사들은 채권 중심 포트폴리오와 금리 민감형 전략을 통해 7~10%대 수익률을 기록하며 “예금만이 답은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다만 이런 변화가 시장 전체의 판을 바꾸기엔 아직 역부족이다. 여전히 압도적 다수의 돈은 원리금보장형에 묶여 있고, 많은 근로자는 자신의 퇴직연금이 어디에 어떻게 투자되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 “퇴직연금 계좌는 있지만, 로그인해 본 기억은 없다”는 말이 낯설지 않은 현실이다.

퇴직연금은 이름만 ‘연금’이라고 붙인 통장이 아니다. 10년 평균 연 2%라는 숫자 뒤에는 “이대로 가면 노후 생활비가 턱없이 부족할 수 있다”는 경고가 숨어 있다. 이제 선택지는 분명하다. ‘잃지 않겠다’는 이유로 앉아서 까먹는 통장으로 남겨둘 것인지, 합리적인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물가를 이기는 진짜 연금으로 만들어 갈 것인지다.

지금의 2%대 장기 수익률은, 더 이상 외면하기 어려운 ‘노후 리스크’다. 경제가 버는 속도보다 물가가 오르는 속도가 빠른 세상에서, 퇴직연금의 체질 개선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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