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 성공회 초등학교, ‘케데헌’ 노래 금지 조치
영국 잉글랜드 도싯주 풀(Poole)에 위치한 릴리풋 성공회 유·초등학교(Lilliput Church of England Infant School)가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KPop Demon Hunters·케데헌) OST를 학교에서 부르지 말 것을 학부모들에게 요청한 사실이 알려졌다.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와 현지 매체들에 따르면, 이 학교는 최근 학부모에게 보낸 서한에서 “영화 속 악귀(demons) 언급이 일부 기독교 가정에 깊은 불편함을 줄 수 있다”며 “학교의 기독교적 정체성을 고려해, 아이들이 학교 내에서 케데헌 노래를 부르지 않도록 협조해 달라”고 밝혔다.
케데헌은 K팝 걸그룹 ‘헌트릭스(Huntr/x)’가 악귀와 맞서 싸우는 내용을 담은 애니메이션으로, 2025년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이후 전 세계 스트리밍 1위를 기록하고, OST ‘Golden’이 빌보드 글로벌 차트 정상에 오르는 등 흥행 열풍을 일으킨 작품이다.
“악귀 언급, 일부 기독교 가정에 깊은 불편감”
릴리풋 학교의 로이드 얼링턴 대행 교장은 학부모 서한에서 “가정에서 어떤 콘텐츠를 볼지는 부모의 선택을 존중한다”면서도, “우리 학교 공동체 안에는 다양한 신앙이 있으며, 일부 기독교인에게 ‘악귀’ 언급은 하나님과 선(善)에 반하는 영적 존재를 떠올리게 해 매우 불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설령 가상의 설정이더라도, 악귀와 관련된 표현을 ‘재미있게 소비’하는 것 자체가 신앙과 충돌한다고 느끼는 이들이 있다”며, “신앙 때문에 이런 주제를 피하고 싶어하는 가정 역시 학교 공동체의 일원인 만큼, 이들의 감수성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학교 측은 이후 추가 안내에서 케데헌이 팀워크, 용기, 친절 같은 긍정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점에는 동의한다면서도, “그럼에도 신앙적 이유로 해당 노래를 불편해하는 이들이 존재하며, 신앙을 이유로 불편함을 호소하는 목소리 역시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을 재확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학부모 “너무 과한 조치”… “아이들에겐 그저 즐거운 K팝”
이번 조치는 학부모들 사이에서도 엇갈린 반응을 낳고 있다. BBC에 의견을 전한 한 학부모는 자신을 무신론자라고 밝히며 “딸이 K팝을 정말 좋아하고, 친구들 모두 케데헌 노래를 즐겨 부른다”며 “아이들에게는 단지 신나는 노래일 뿐인데, 학교가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 같아 황당했다”고 말했다.
그는 “학교가 특정 종교 기준을 너무 적극적으로 전면에 내세우면, 종교를 믿지 않는 가정에는 오히려 ‘강요’처럼 느껴질 수 있다”며 불만을 나타냈다. 또 다른 학부모들도 “케데헌 노래로 아이들이 팀워크와 용기의 의미를 배우고 있다”며 학교 측이 노래 자체의 긍정적 효과를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반면 일부 학부모는 학교 판단을 지지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은 “믿음의 관점에서 악귀·마귀와 관련된 표현은 가볍게 소비할 주제가 아니다”라며 “기독교 학교를 선택한 이유도 이런 가치관을 일정 부분 공유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하고 있다.
해리 포터는 되고, ‘케데헌’은 안 되나… 이중잣대 논란도
이번 논란이 커진 이유는, 영국 사회에서 ‘판타지·마법’ 소재가 이미 일상적인 문화 코드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여전히 전 세계에서 사랑받는 ‘해리 포터’ 시리즈다. 해리 포터는 마법사 학교 ‘호그와트’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 소설로, 영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 학교에서 수업 자료나 독서 교육 텍스트로 활용돼 왔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마법사와 주문, 어두운 마법까지 등장하는 해리 포터는 교육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다루면서, 한국 전통 설화와 도깨비·악귀 모티프를 차용한 케데헌에는 유독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영국 안에서는 마법사 이야기인 해리 포터는 문화·교육 콘텐츠로 환영하면서, 한국형 판타지인 케데헌의 ‘악귀’ 언급만 문제 삼는 것은 결국 익숙한 서양 판타지에는 관대하고, 낯선 동양적 상징에는 보수적으로 반응하는 이중잣대 아니냐”는 비판적 목소리다.
물론 해리 포터 역시 과거 일부 보수 기독교 단체에서 “마법과 점성술을 미화한다”는 이유로 논쟁을 겪은 바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주류 교육·문화 콘텐츠로 자리 잡은 반면, 케데헌은 등장 초반부터 ‘악귀’라는 단어 자체가 도마에 오른 셈이라, 문화적 친숙함의 차이가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글로벌 K콘텐츠와 종교·문화 감수성, 어디서 선을 그을까
케데헌은 한국의 도깨비·호랑이·한문(韓文) 등 전통 모티프를 현대 K팝, 퀴어 정체성, 혼혈·혼종성 담론과 섞어낸 ‘한국형 판타지 뮤지컬 애니메이션’로 글로벌 시장에서 흥행에 성공했다. 그만큼 세계 각지의 교실과 놀이터에서 자연스럽게 소비되는 대중문화가 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번 영국 초등학교의 ‘노래 금지’ 조치는, 한편으로는 특정 신앙을 존중하기 위한 선택으로 볼 수 있다. 동시에, 이미 일상 속에 깊이 들어온 글로벌 K콘텐츠를 어디까지, 어떤 기준으로 제한할 것인지에 대한 새로운 질문도 던진다.
해리 포터와 케데헌, 둘 다 마법과 초자연적 존재가 등장하는 판타지다. 어느 쪽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느냐는 결국 각 공동체의 문화적·종교적 경험에 달려 있을 것이다. 다만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는 단순한 즐거움 속에 이미 ‘세계 시민’으로서의 경험이 쌓이고 있다는 점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