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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교통약자에게 좌석을 허하라
  • 장한님 편집장
  • 등록 2025-12-12 12:5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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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내용 이해를 돕기 위한 그림(AI 생성)




퇴근길 버스에서 우리는 자주 이런 풍경을 목격한다. 노란색 노약자석, 핑크색 임산부석이 멀쩡히 있는데도 정작 교통약자는 서서 가는 풍경. 그 좌석에는 사지 멀쩡하고 건강한 성인이 앉아 스마트폰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무례가 아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얼마나 형식적인지를 보여주는 우리 사회의 민낯이다.

 

     


법은 있되처벌은 없다

한국의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은 교통약자석 설치와 표시를 의무화한다. 하지만 정작 일반 승객이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고 처벌하는 조항은 없다. 과태료는 주차 방해나 허위 인증 같은 다른 위반 유형에만 적용될 뿐이다.

결국 법은 '자리를 만들라'고만 할 뿐, '자리를 내주라'고는 강제하지 못한다. 서울시는 임산부 배려석을 운영하고, 차내 방송과 영상으로 '비워두기' 홍보를 지속한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캠페인일 뿐이다.

법적 강제력이 없는 자리는 결국 양심에 맡겨진 자리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양심은 아직 그 자리를 지키기에 충분하지 못하다.

 


 

다른 나라들은 어떨까

북미 일부 도시는 다르다. 미국 샌디에이고 대중교통(MTS) 2016 조례 개정으로 우선석을 비우지 않으면 단계별 벌금( 25달러재발 50달러최대 100달러)을 부과할 수 있게 했다. 캐나다 토론토 교통국(TTC)도 우선석 미양보 시 235달러 벌금을 명시한다.

 

샌디에이고 대중교통(MTS) 홈페이지에 명시된 교통약자(우선석) 위반 벌금에 대한 안내: 교통약자가 탔을 때 그 좌석을 양보하지 않으면 첫 번째 위반 시에는 $25, 두 번째 위반 시에는 $50, 세 번 이상 위반 시에는 $100을 부과한다. (https://www.sdmts.com/inside-mts/media-center/news-releases/mts-ramps-wheelchair-and-priority-seating-enforcement)


유럽은 또 다른 방식이다. 영국 런던 교통국(TfL)은 법적 강제 대신 배려 문화와 배지 시스템을 운영한다. 'Please Offer Me a Seat' 배지를 착용한 이에게는 자연스럽게 자리를 양보하는 문화가 자리 잡았다.

대만은 2025년 우선석 대상을 '실제 필요가 있는 사람'으로 확대하는 법 개정을 통과시켰다. 보이는 고령자나 임산부뿐 아니라 비가시적 장애나 일시적 부상을 겪는 이들까지 포괄하는 진전이다.

각국의 접근은 다르지만, 공통점은 하나다. 교통약자의 권리를 단순한 '부탁'이 아니라 '제도'로 보장하려는 노력이다.

 

 


법이 약한 곳에서는 문화가 강해야 한다

한국은 처벌 규정을 만들지 못했다. 그렇다면 문화로 풀어야 한다.

첫째, '비워두기' 표준 캠페인으로 상시화해야 한다. 서울교통공사와 보건복지부가 진행한 임산부 배려 캠페인처럼 차내 영상과 포스터, 배지 중심 홍보를 전 노선에 상시 운영해야 한다.

둘째, 대상 정의를  포괄적으로 고지해야 한다. 대만처럼 '실제 필요가 있는 사람'이라는 문구를 공식 표기와 방송에 병기하자. 비가시적 질환, 일시적 부상, 유모차가 있는 부모도 당당히 앉을 수 있어야 한다.

셋째, 현장 지원 루트를 명확히 해야 한다. 지하철의 경우 "불편 시 보안관 호출, 역무원 인터폰 이용"을 스티커와 도어 상단에 그림 아이콘으로 고지하자. 버스의 경우에는 좀 어렵겠지만, 꼭 필요할 때는 버스 기사에게 요청할 수밖에 없다. 어떤 방식으로든 교통약자가 직접 맞서 싸우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가 대신 나서야 한다.

넷째, 시민 참여형 측정을 도입하자. '우선석 점유율·양보 응답률'을 공개 대시보드로 역별, 노선별로 공개해 개선 경쟁을 유도할 수 있다.

다섯째, 학교와 직장 연계 교육이 필요하다. 지자체와 기관이 생활 시민교육(시민성·약자 배려) 프로그램으로 연계해 어릴 때부터 배려의 가치를 체화하도록 해야 한다.



한국도 버스와 지하철에 교통약자석이 갖추어져 있다. 장애인뿐만 아니라 임산부와 노인, 어린 아이와 같이 탄 부모도 포함된다. (사진: 메인타임스)

좌석은 권리다시혜가 아니다

교통약자석은 '베푸는 자리'가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권리다.

노약자는 서 있다가 넘어질 수 있다. 임산부는 혼잡한 차량에서 압박을 받을 수 있다. 비가시적 장애를 가진 이는 외관상 건강해 보여도 극심한 고통 속에 있을 수 있다.

그들에게 자리를 내주는 것은 '착한 행동'이 아니라 민주 시민의 '당연한 의무'다. 법이 그것을 강제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양심이 강제해야 한다.

 

 

더 이상 교통약자가 서있게 하지 말자.

법이 약한 영역일수록, 시민의식과 캠페인이 강해야 교통약자의 권리가 실현된다.

한국 사회는 지금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북미처럼 과태료로 강제할 것인가, 유럽처럼 문화로 승화시킬 것인가.

어느 쪽이든 좋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더 이상 교통약자가 서서 가는 사회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교통약자에게 좌석을 허하라. 그것은 시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품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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