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치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집권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다카이치 사나에가 승리하며 일본 역사상 첫 여성 총리가 사실상 확정됐다. 보수 강경파 정치인으로 알려진 그가 내세운 ‘위기관리 국가’ 비전은 일본 내부는 물론, 한국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새 총리의 등장 배경과 정치적 한계, 그리고 한국에 닥칠 기회와 리스크를 짚어본다.
일본 사회는 최근 경기 둔화, 고령화, 에너지 불안, 지정학적 긴장이라는 4중고에 직면해 있다. 다카이치는 이런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국가가 직접 위기 대응에 투자해야 한다”는 점을 강하게 강조해왔다. 식량 자급률 제고, 에너지 안보 확보, 반도체와 첨단소재 산업 육성, 방위력 증강 등이 핵심 공약이다.
그의 정치적 색채는 명확하다. 보수·국수주의 노선을 추구하며, 역사 인식에서도 강경한 입장을 보여왔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공개적으로 지지한 바 있고, 영토 문제에서도 일본 우익과 유사한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따라서 다카이치 내각은 일본의 보수적 색채를 한층 강화할 가능성이 크다.
다만 정치적 기반은 탄탄치 않다. 자민당은 중의원과 참의원에서 과반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어, 안정적 국정 운영에는 제약이 따른다. 일본 국민 여론도 자민당에 비판적 기류가 강해, 다카이치의 리더십이 초반부터 시험대에 오를 수 있다.
보수 강경 성향이 강화되면 과거사·영토 문제에서 한일 갈등이 재점화할 수 있다. 독도 영유권 주장, 위안부 문제의 재부상은 양국 관계를 다시 냉각시킬 수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안보 협력의 필요성은 더 커진다. 북한의 미사일 위협, 중국의 군사적 팽창, 대만 해협 위기 등은 한일 양국이 미국과 함께 공조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다. 미·일·한 삼각 협력 체제 강화는 다카이치 내각에서도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일본은 반도체·배터리·희토류·첨단소재 등 전략 산업에 대규모 투자를 예고했다. 이는 한국 기업과의 경쟁을 격화시킬 요인이지만, 동시에 공급망 안정화 차원에서 협력 기회도 열릴 수 있다. 예컨대 배터리 원자재 공동 확보, 반도체 장비 공동 개발 등이 현실화될 수 있다. 다만 일본이 보호무역적 색채를 강화할 경우, 한국 기업의 대일 수출이 다시 압박받을 수 있다는 점은 리스크다.
일본 정부가 외국인 투자 유치에 나서면, 한국과 자본 유치 경쟁이 심화될 가능성이 있다. 특히 아시아 내 제조업·첨단산업 거점을 두고 한국과 일본이 직접 경쟁할 수 있다. 또한 일본의 금리·환율 정책 변화가 한국 금융시장에 파급될 수 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최근 엔저 기조가 이어진다면 한국 수출 경쟁력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다카이치가 보수적 역사 인식을 밀어붙일 경우, 위안부·강제징용 배상 문제는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를 수 있다. 이는 양국 간 협력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으며, 민간 교류와 문화 교류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다. 특히 한일 젊은 세대 사이에서 쌓여가던 문화적 친밀감이 정치·외교 갈등으로 흔들릴 가능성도 있다.
다카이치 내각의 향방은 크게 세 가지 길로 나뉠 수 있다. 첫째는 강경 보수 노선을 고수하는 경우다. 이 경우 일본은 역사와 영토 문제에서 한 발도 물러서지 않을 것이고, 독도 문제나 위안부, 강제징용 같은 민감한 사안들이 다시 양국 관계를 뒤흔들 가능성이 높다. 한국에서는 반일 여론이 거세질 수 있고, 일본 내에서도 혐한 정서가 강화될 수 있다.
둘째는 현실주의적 균형을 택하는 시나리오다. 일본 역시 안보와 경제라는 현실적 제약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한일 협력을 확대할 여지도 있다. 특히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과 중국의 군사적 팽창, 공급망 불안정 문제는 한국과 일본이 힘을 합칠 수밖에 없는 영역이다. 이 경우 다카이치 내각은 보수적 기조를 유지하되, 전략적 협력을 강화하는 길을 선택할 수 있다.
셋째는 정치적 불안정이 변수로 작용하는 경우다. 자민당이 양원에서 과반을 차지하지 못한 상황에서, 총리의 리더십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할 수도 있다. 국내 정치의 흔들림이 대외정책에도 연속성을 약화시키고, 이는 곧 한일 관계의 불확실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한국은 이번 변화를 단순히 일본의 정치적 이벤트로 보아서는 안 된다. 외교, 산업, 안보, 문화 전반에 걸쳐 직접적인 파장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는 무엇보다 외교적 채널을 상시 가동해 갈등을 최소화해야 한다. 다카이치 내각이 강경한 목소리를 내더라도, 대화를 통해 협력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 중요하다.
산업 측면에서는 일본과의 경쟁을 인정하되, 단순히 따라가기보다는 차별화된 기술력과 시장 전략으로 우위를 확보해야 한다. 동시에 배터리, 반도체, 방산 같은 분야에서는 ‘경쟁적 협력’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안보 영역에서도 한국은 미·일·한 협력 틀을 유지하면서 독자적 방위 역량을 더욱 키워야 한다.
역사 문제에서는 원칙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위안부나 강제징용 같은 사안은 명확한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양국 젊은 세대 간의 문화적 교류는 지켜내야 한다. 정치 갈등이 민간의 유대마저 훼손하지 않도록 균형을 잡는 것이 필요하다.
결국 다카이치 사나에의 총리 등장은 한국에 복합적인 함의를 던진다. 일본 내부의 정치 변화가 단순히 일본에만 머무르지 않고, 곧장 한국의 외교와 경제,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외교와 안보에서는 협력과 갈등이 교차하고, 경제와 산업에서는 경쟁과 협력이 동시에 나타날 것이다. 역사 문제는 여전히 불안정 요인으로 남겠지만, 전략적 유연성을 발휘한다면 오히려 협력의 기회로 전환할 수도 있다.
따라서 한국이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위기를 위기로만 보지 않고, 기회로 활용할 수 있는 전략을 준비하는 것이다. 일본의 변화는 한국에 있어 피할 수 없는 도전이자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이다. 앞으로 몇 달, 그리고 몇 년이 한일 관계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시험대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