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딸을 잃은 자리에 한 남자는 제국을 세운다. 그 제국의 이름이 ‘포르투갈’이라는 사실은, 이 소설의 비극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상징하는 장치다. 셀마 라겔뢰프의 장편소설 『포르투갈 황제』는, 부성애·상실·광기가 한데 뒤엉켜 만들어낸 슬픈 환상극이다. 여성 최초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의 숨겨진 대표작이 1914년 발표된 지 100년이 훌쩍 지난 뒤, 2025년에서야 국내 최초 완역으로 소개됐다는 사실도 인상적이다.
이야기는 19세기 중반 스웨덴 변방의 작은 시골 마을, 스크롤리카에서 시작한다. 가난한 농장 일꾼 얀 안델손은 아내의 임신 소식을 듣고도 기쁨보다 걱정이 앞서는 인물이다. 하루 품팔이로도 벅찬 삶에 “계획에 없던 아이”가 태어나면, 노동 뒤에 육아까지 떠안게 될 것이라는 푸념부터 쏟아내는, 감정이 메마른 남자다. 그런데도 막상 딸을 품에 안는 순간, 그는 생전 처음으로 심장이 뛰는 경험을 하고, 그때 비로소 자신이 제대로 살아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때부터 얀의 인생은, 한 사람—딸 클라라—를 향해 완전히 기울어 버린다.
소설의 초반부는 그야말로 ‘딸 바보’ 아버지의 초상이다. 얀은 딸에게 온갖 애정을 쏟아붓고, 클라라 역시 그런 사랑에 기꺼이 응답하며 둘만의 작은 우주를 만든다. 어느 날 학교에서 “신을 뭐라고 부르냐”는 질문을 받은 클라라는, 망설임 없이 “우리는 신을 얀이라고 부릅니다”라고 답한다. 자신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는 존재, 실패도 가난도 사랑으로 덮어버리는 절대자가 바로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이 사랑은 동화처럼 따뜻하고, 조금은 과잉이며, 동시에 불길하다. 이 과잉이 결국 어디까지 갈 것인지, 독자는 초반부터 은근한 불안을 품게 된다.

하지만 동화는 오래가지 않는다. 새로 농장을 인수한 주인이 더 높은 돈을 요구하면서, 얀의 가족은 집을 잃을 위기에 몰린다. 열여덟 살이 된 클라라는 부모를 살리기 위해 자신이 도시 스톡홀름에 가서 돈을 벌겠다고 결심한다. “딸이 있으니 괜찮다”고 믿고 버텨 왔던 얀의 세계는, 그 딸이 떠나는 순간부터 조용히 금이 가기 시작한다. 어느 순간 클라라에 대한 소식은 뚝 끊기고, 마을에는 좋지 않은 소문이 떠돈다. 연고도 없는 여성이 대도시에 가서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라는 시대의 상식은, 클라라가 결국 몸을 팔게 되었다는 잔인한 암시로 이어진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얀은, 현실 대신 ‘더 달콤한 세계’를 만들어낸다. 그는 “딸이 사실은 머나먼 포르투갈의 여황제가 되었고, 자신은 그 아버지인 포르투갈 황제 요하네스”라고 믿기 시작한다. 이때 소설은 하루아침에 색조를 바꾼다. 가난한 농장 일꾼이었던 남자는 이제 황제의 복장을 하고 교회 맨 앞줄에 앉고, 잔치에선 상석을 차지하며, 마을 지배층과 동등하게—or 그 이상으로—자신을 대우한다. 마을 사람들은 딸의 불행을 알고 있는 이들은 측은함에서, 잘 모르는 이들은 재미와 호기심에서 그를 떠받들며 장단을 맞춘다. 얀은 조롱과 연민과 애매한 존경이 섞인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일종의 ‘성스러운 바보’로 변모한다.
라겔뢰프는 이 광기를 조롱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망상이야말로 “현실보다 윤리적인 세계”일 수 있다는 점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현실에서 얀은 가난과 계급에 눌린 농장 일꾼이지만, 포르투갈 제국의 황제인 그는 누구보다도 강하고 공정하며 존엄한 존재다. 그는 허황된 상상 속에서나마 약자를 편들고, 부당한 권력을 웃음거리로 만들며, 스스로를 “사랑을 위해 타락한 왕”으로 만든다. 아버지가 딸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방식이, 현실 도피이자 동시에 자기 희생이라는 이 모순이야말로 『포르투갈 황제』가 가진 가장 큰 비극의 에너지다.

이 작품의 배경은 라겔뢰프의 고향인 스웨덴 베름란드 지방, 1860~70년대 농촌 사회다. 작가는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 다른 작품들에서도 신화적 상상력과 현실의 가난, 종교적 정서와 사회 구조를 교차시켜 왔는데, 『포르투갈 황제』는 그 중에서도 특히 “스웨덴판 『리어 왕』”에 비유될 만큼 사랑과 상실의 감정을 전면에 내세운다. 또한 라겔뢰프 연구자들은 이 소설을 “걸작 중의 걸작”으로 꼽으며, 작가의 후기 세계관이 집약된 작품으로 평가한다.
작가의 삶이 비치는 대목도 흥미롭다. 라겔뢰프는 1909년 여성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았고, 『닐스의 모험』 같은 아동·청소년 문학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포르투갈 황제』에서는 훨씬 더 어둡고 복잡한 정조를 보여준다. 작가의 집안이 어려워져 고향 농장을 정리하고 떠났던 경험,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느꼈던 죄책감 등이 딸 클라라의 서사에 투영돼 있다는 해석도 있다. 그래서일까. 클라라는 동화 속 효녀가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이 벅차고 버거운 ‘현실적인 딸’로 그려진다. 사랑이 지나치게 큰 쪽이 언제나 더 상처를 입는다는 사실을, 이 소설은 남루한 농가에서 시작된 한 가족의 이야기로 고요하게 증명한다.
한국어판은 출판사 다반에서 국내 최초 완역본으로 출간됐다. “성인을 위한 동화”, “사랑·상실·광기의 대서사시”라는 카피는 이 작품을 설명하기에 과장이 아니다. 책은 비교적 짧은 분량 속에 동화 같은 장면과 잔혹한 현실, 환상과 비극을 촘촘히 겹쳐 놓는다. 연합뉴스는 “딸을 향한 그리움이 빚은 슬픈 환상”이라는 표현으로 이 작품을 소개했는데, 실제로 얀이 만들어낸 ‘포르투갈 제국’은 사랑이 만든 거대한 거짓말이자, 동시에 그 거짓말 덕분에 겨우 유지되는 인간의 존엄이기도 하다.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지금 우리의 풍경도 겹쳐 보인다. 지방을 떠나 서울로, 혹은 해외로 나간 자녀들, 텅 빈 고향집에 남은 부모, 연락이 뜸해지는 사이에 나란히 쌓여가는 오해와 상처들. ‘딸바보’라는 말이 유행처럼 소비되는 시대지만, 실은 그 말 뒤에는 자식을 향한 과잉의 사랑과, 그 사랑이 이해받지 못할 때 찾아오는 고독이 숨어 있다. 『포르투갈 황제』는 이 익숙한 풍경을 북유럽의 옛 시골마을로 옮겨 놓고, 한참을 들여다보게 한다. 부모의 사랑은 왜 늘 한쪽으로 기울어 있을 수밖에 없는지, 자식은 언제쯤 그 사랑의 무게를 이해하게 되는지, 이 소설은 단정적인 답 대신 오래 남는 질문을 남긴다.

결말은 명확한 해피엔딩도, 완전히 절망적인 새드엔딩도 아니다. 비극적 사건 이후, 클라라는 아버지의 무너진 삶 전체가 자신을 향한 사랑의 형식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그러나 깨달음이 곧 치유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독자가 책을 덮은 뒤에도 오래 마음에 남는 것은, 바로 이 어긋난 타이밍, 서로를 향해 있었지만 끝내 맞물리지 못한 시선들이다.
『포르투갈 황제』는 결국 한 남자의 광기를 그린 소설이 아니라, 사랑이 인간을 어디까지 데려갈 수 있는지를 끝까지 추적하는 이야기다. 누군가를 사랑해본 사람, 누군가를 떠나온 사람, 혹은 이미 떠나보낸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 책에서 자신의 얼굴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렇게 중얼거리게 될지 모른다. “현실은 잔인하지만, 사랑은 때로 그 잔인함을 견디기 위해 거짓말을 필요로 한다”고. 그 거짓말의 이름이 바로, 이 소설에서 ‘포르투갈’이라는 나라로 불릴 뿐이다.
《천수연의 AI시대 한국문화 읽기》김치와 김장, 시대를 넘어 이어지는 한국의 맛과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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