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이 드디어 음악 차트의 문을 제대로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AI로 만든 노래가 스트리밍에서 좀 돈 번다더라” 수준을 넘어, 미국 빌보드의 각종 장르 차트에서 AI 가수가 1위를 차지하는 시대가 열렸다. 완전히 가상으로 만들어진 ‘가수’가 인간 가수들과 똑같이, 아니 어떤 면에서는 더 잘 팔리는 현실이 된 것이다.
브레이킹 러스트 인스타그램
‘거친 카우보이’도 알고 보니 AI였다
최근 미국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AI 가수는 ‘브레이킹 러스트(Breaking Rust)’라는 컨트리 아티스트다. 이름부터 목소리, 음악 스타일까지 전형적인 미국 남부의 거친 카우보이 이미지를 앞세우지만, 정작 실체는 사람 아닌 ‘완전 인공지능 기반 프로젝트’다.
브레이킹 러스트의 곡 ‘Walk My Walk’는 빌보드 ‘컨트리 디지털 송 세일즈 차트’에서 1위를 기록했다. 디지털 음원 판매만 따지는 차트이긴 하지만, 그래도 엄연히 빌보드 공식 차트 1위다. 스포티파이에서는 월간 청취자가 수백만 명에 이르고, 대표곡들은 수백만 스트리밍을 넘긴 상태다.
아이러니한 점은, 노래 가사는 ‘진짜 나답게 살겠다’는 식의 ‘진정성’을 이야기하는데, 정작 그 목소리를 내는 존재는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프로젝트 뒤에 있는 프로듀서의 실명조차 논란이 있을 정도로 정체가 불분명하다는 점도 화제를 더하고 있다.
컨트리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R&B 장르에서는 ‘자니아 모네(Xania Monet)’라는 AI 아티스트가 등장했다. 자니아 모네는 미국 빌보드 ‘Adult R&B Airplay’ 차트에 이름을 올린 첫 AI 가수로 기록되고, R&B 디지털 송 세일즈, 이머징 아티스트 차트에서도 상위권을 차지하며 사실상 “AI 스타” 반열에 오른 상태다.
하지만 자니아 모네의 음악을 만드는 사람은 분명히 존재한다. 미국 미시시피 출신 시인 텔리샤 ‘니키’ 존스가 자신의 시와 멜로디를 바탕으로 가사를 쓰고, 선오(Suno) 같은 AI 음악 툴로 곡을 만들어 ‘자니아’라는 가상의 가수에게 입혀서 내보내는 구조다. 다시 말해, 얼굴과 목소리는 가상이고, 창작의 상당 부분은 여전히 인간이 담당하는 하이브리드 모델인 셈이다.
자니아 모네 인스타그램“사람 노래인지 AI인지 구분 못 하겠다”
AI 가수가 빌보드 차트에 진입하고 1위까지 차지하게 된 배경에는, 단순히 기술이 좋아졌다는 것 이상의 맥락이 있다.
프랑스 스트리밍 서비스 디저(Deezer)와 입소스(Ipsos)가 진행한 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97%가 실제 사람의 음악과 AI가 만든 음악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다는 결과가 나왔다. 참가자들은 세 곡 중 어떤 곡이 완전 AI 생성 음악인지 고르는 테스트를 했지만, 거의 ‘찍기 수준’에 그쳤다.
이 와중에 AI로 만든 곡들이 스포티파이 ‘바이럴 50’이나 빌보드 디지털 송 세일즈 같은 주요 차트에서 1위를 찍으면서, “이미 듣는 사람들은 AI인지 아닌지도 모른 채 좋아하고 있다”는 현실이 드러난 셈이다.
물론 장밋빛 이야기만 있는 건 아니다. AI 음악의 부상과 함께 각종 논란도 동시에 터져 나왔다.
네덜란드의 한 AI 뮤지션이 반이민 정서를 담은 곡을 AI로 만들어 차트 상위권에 올렸다가, 플랫폼에서 곡이 삭제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표현의 자유냐, 혐오 조장 콘텐츠냐를 두고 논쟁이 격해졌다.
또 한편에서는 ‘가짜 드레이크·위켄드 곡’으로 유명해진 AI 노래 ‘Heart on My Sleeve’가 그래미 후보 자격 논란을 겪었다. 작곡은 사람이 했지만, AI로 만든 목소리가 정식 허가를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래미는 결국 “수상 후보 자격이 없다”고 못 박았다.
여기에 인종차별적 캐릭터 설정과 문화적 전유 논란으로 메이저 레이블에서 계약을 끊긴 AI 래퍼 FN Meka 사례까지 겹치면서, 업계에서는 “AI 아티스트 시대에 규칙과 윤리를 어디까지,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라는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브레이킹 러스트 인스타그램“AI가수 금지” vs “그냥 새로운 악기로 봐야 한다”
음악 업계의 반응도 양극단으로 갈린다.
일부 뮤지션들은 “AI 가수가 사람 가수들의 일자리를 빼앗는다”, “진짜 인생과 감정이 담긴 음악과는 다르다”며 강하게 반발한다. 실제로 몇몇 R&B, 팝 아티스트들은 공개적으로 “AI 보컬은 차트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반대로, AI 프로젝트를 이끄는 쪽에서는 “AI는 사람을 대체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표현 도구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자니아 모네의 제작자처럼 시인·작곡가가 AI를 활용해 혼자서는 구현하기 어렵던 사운드를 찍어 내고, 가상 아티스트라는 껍데기에 자신이 만든 세계관을 입히는 방식이죠.
결국 싸움의 핵심은 “음악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보는 게 무엇이냐”에 대한 가치관의 충돌이다. 라이브, 인간성, 서사 같은 요소를 중시하는 쪽과, 완성도 높은 사운드와 재밌는 설정이면 충분하다고 보는 쪽의 시선이 부딪히고 있는 것이다.
K팝·한국 음악에도 다가오는 질문
이제 남은 질문은 이것이다.
“이 흐름, 한국에도 곧 온다. 우리는 어떤 AI 가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나?”
이미 버추얼 아이돌, 메타버스 그룹, 디지털 휴먼 모델 등은 K팝 씬에서도 익숙한 존재가 됐다. 여기에 진짜로 ‘노래까지 AI가 만든 가수’가 빌보드 차트에 이름을 올리고, 1위를 찍는 장면까지 목격한 지금, 한국 음악 산업도 곧 같은 질문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누구의 음악을 듣고 있는지, 무엇에 돈을 지불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람 창작자의 몫은 얼마나 보장되는지.
AI 가수의 빌보드 1위는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 음악의 정의를 다시 묻게 만드는 상징적인 사건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