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김장하는 모습 (사진: 고양신문 제공)
11월의 찬바람이 불면 한국의 겨울을 여는 큰 행사가 찾아온다. 바로 김장이다.
아파트 단지 게시판에 ‘김장 쓰레기 배출 안내’ 공지가 붙고,
집집마다 배추를 다듬는 모습이 포착되면 한 해의 마지막 계절이 성큼 다가온 것을 실감한다.
김장은 이제 더 이상 생존을 위한 ‘겨울 대비’만은 아니다.
사시사철 갓 담근 김치를 살 수 있고, 세계 각국의 음식을 배달로 주문하는 시대에도 김장은 여전히 한국인의 연례 일정 속에 살아 있다.
오히려 기술과 생활 방식이 급격히 변할수록 김장은 한국인의 정체성을 다시 확인하는 문화적 연결장치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김치는 본래 채소를 오래 저장하기 위해 발달한 음식이다.
독일의 사우어크라우트, 중국의 파오차이처럼 세계 곳곳에 유사한 발효 채소가 존재하지만, ‘젓갈을 채소와 함께 발효시키는 방식’은 오직 한국 김치에만 나타나는 독자적 기술이다.
여기에 파·마늘·생강·고추를 섞어 만든 복합 양념인 ‘김칫소’는 발효를 억제하기보다 오히려 촉진하며 김치를 ‘살아 있는 음식’으로 만든다.
다채로운 향신 채소와 젓갈이 어우러지며 만들어내는 발효의 힘은, 시간이 지나며 스스로 변화하는 하나의 생명체와도 같다. 김치를 담근 후 비닐 팩이 며칠 만에 빵빵해지는데, 이때 최대 1g당 1억 마리 이상 증식하는 김치 유산균은 다른 발효 채소에서는 보기 힘든 김치 고유의 생태적 특징이다.
김장이 중요한 이유는 그 과정이 단순한 조리가 아니라 공동체의 노동과 정, 나눔의 기억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배추를 절이고 씻고, 양념을 만들고, 속을 넣고, 다시 꾹꾹 눌러 담기까지 이어지는 2~3일의 과정은 한 사람이 감당하기 어려운 큰일이다.
그래서 김장은 늘 함께해야 했고, 자연스레 ‘김장 품앗이’라는 공동체 문화가 형성되었다.
서로 일손을 보태고 음식을 나누는 겨울의 풍경 속에서 김장은 단순한 저장식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는 우리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아파트 거주 증가, 절임배추의 상품화, 김치냉장고의 보급은 김장의 풍경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많은 가정이 더 이상 대규모 김장을 하지 않게 되었고, 가족 구성원의 노동력도 점차 줄어들었다. 과거에는 ‘날씨’를 보며 김장 날짜를 정했지만, 오늘날 기준은 ‘가족이 모두 모일 수 있는 날’로 바뀌었다.
김장을 하지 않더라도 일손을 돕기 위해 가족행사처럼 참여하거나, 회사와 지자체에서 주최하는 사회적 김장 행사에 동참하는 모습은 변화된 시대의 김장이 어떻게 공동체의 외연을 확장해 왔는지 잘 보여준다.
김치의 날 포스터 (사진: 농림축산식품부 제공)
2013년, ‘김장문화’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김장이 더 이상 한 집의 겨울 준비가 아니라, 인류가 보전해야 할 공동의 문화유산임을 세계가 인정한 것이다.
이어 2015년에는 북한의 김장문화도 등재되면서, 김장이 분단의 경계를 넘어 한민족의 정서적·문화적 동질성을 잇는 매개임이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한국은 2020년부터 11월 22일을 ‘김치의 날’로 제정했다.
이는 김치의 주재료인 배추가 11가지 효능과 22가지 영양적 가치를 지닌다는 의미를 담은 상징적 날짜이기도 하다.
시대가 급격히 변화해 AI 시대에 들어서면서 ‘김장을 하지 않는다’는 사람이 늘고 있지만, 김장의 가치와 상징성은 오히려 더 단단해지고 있다.
AI가 레시피를 알려주고, 온라인으로 절임배추를 주문할 수 있어도 사람들은 여전히 김치를 ‘누군가와 함께 만들어야 더 맛있는 음식’으로 기억한다.
그 본질이 공동체적 경험에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 기술이 김치 유산균의 효능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전통 레시피를 데이터화하며, 김장문화를 VR로 재현하는 등 새로운 계승 방식을 만들어내고 있지만, 김장의 핵심 가치는 '여전히 함께 담그고 함께 나누는 문화'에 머물러 있다.
김치 (사진: 네이버스토어 지니-팜 제공)
세계화 시대, 김치는 한국을 상징하는 대표 음식이자 K-푸드의 중심에 섰다.
동시에 김장은 한국인의 삶과 감정, 계절의 리듬, 가족의 기억을 아우르는 생활문화로 세계의 관심을 받고 있다.
AI 기술이 발전해도 이 복합적인 문화 DNA는 쉽게 대체되지 않는다.
김장은 발효의 생명력처럼 천천히, 그러나 깊게 한국인의 정체성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김장을 한다는 것은 단지 겨울 식량을 마련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의 시간과 손맛을 오늘의 삶으로 불러오는 일,
그리고 기계가 대신할 수 없는 공동체적 경험을 미래로 잇는 일이다.
AI가 삶을 지배하는 시대일수록, 김장은 우리에게 묻는다.
“무엇이 우리를 한국인으로 이어주는가?”
그 답을 찾기 위해, 올해도 우리는 다시 김장을 한다.
글: 천수연(서울사이버대학교 한국어교육학과 대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