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쿠팡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 사태 이후 “김범석이 한국을 무시한다”는 비판이 폭발했다. 논란을 키운 건 ‘출석이 불투명하다’는 관측이 아니라, 국회 청문회 불출석을 이미 서면으로 못 박은 ‘사유서의 문장’이었다.
‘무시’라는 단어는 의도를 단정한다. 의도는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왜 이런 인상이 만들어졌는지, 국민 정서가 어디에서 폭발했는지는 사건의 흐름과 구조를 보면 설명이 된다.
이번 침해는 6월 무렵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외부 침입으로 3,300만명 수준의 고객 정보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도됐다. 노출된 항목은 이름, 이메일, 전화번호, 배송지 주소, 일부 주문 이력 등이었고 결제정보나 로그인 자격증명은 포함되지 않았다고 한다.
정부는 엄정 조사 방침을 밝혔고 경찰은 쿠팡 서울 사무실을 압수수색하는 등 수사도 진행됐다.
쿠팡은 사태 이후 국내 경영 책임자였던 박대준 CEO가 사임했다고 발표했다. 임시 CEO는 미국 모회사 측 최고관리책임자(CAO) 해롤드 로저스가 맡는다고 전했다.
이 대목에서 여론의 분노가 ‘기업’에서 ‘최종 책임자’로 옮겨갔다. 한국에서 대형 사고가 터졌을 때 대중이 기대하는 건 “누가 최종 책임자인가”에 대한 얼굴 있는 설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내 CEO가 물러난 뒤에도, 최종 권한으로 인식되는 인물의 직접 메시지는 보이지 않았다.

국회 과방위는 12월 17일 쿠팡 개인정보 유출 청문회를 열기로 했고, 김범석 의장 등을 증인으로 채택했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이때 김 의장은 이미 불출석 의사를 서면으로 제출했다. 불출석 사유서에는 해외 거주·근무와 함께 “전 세계 170여 국가에서 영업하는 글로벌 기업의 CEO로서 공식적인 비즈니스 일정이 있다”는 취지의 설명이 담겼다. 정치권은 즉각 “책임 회피”라고 반발했고, 과방위원장은 “불출석을 불허한다”는 입장을 내며 강경 대응을 예고했다.
핵심은 ‘못 온다’가 아니라, “공식 비즈니스 일정”을 앞세운 문장이 남긴 뉘앙스였다. 위기 국면에서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규범은 대체로 단순하다. “대면 설명–직접 사과–재발 방지 약속”이다. 그 규범과 정면으로 어긋나는 문장이 나오자, ‘무시’ 프레임이 급속도로 굳어졌다.
여론이 특히 격해진 이유는 쿠팡의 사업 기반이 사실상 한국에 집중돼 있다는 인식 때문이다. 실제로 쿠팡은 미국 SEC 제출 서류에서 “역사적으로 매출의 상당한 다수를 한국에서 발생시켜 왔다”는 취지의 문구를 명시한 바 있다.
이 문장 하나가 대중의 분노를 정리해 준다. “한국에서 기반을 만들어 성장했으면서, 한국의 공적 절차(청문회)에는 ‘바빠서’ 선을 긋는다”는 해석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의도 단정은 어렵지만, 정서적으로 최악의 조합이었던 건 부인하기 힘들다.
일각에서 김범석의 태도를 “미국에 사는 한국인들이 한국을 무시하는 경향”과 직결시키는 해석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프레임을 ‘디아스포라’ 이야기로 연결하는 시도는 흥미롭다. 하지만 “미국 거주 한국계가 한국을 무시한다”는 단정은 데이터와 맞지 않는다. 미국 내 한국계 성인 다수가 한국에 호감을 갖고 있다는 조사 결과(호감 86%)가 있다.
다만 ‘일부’에게서 모국을 낮춰 말하거나 거리를 두는 태도가 나타나는 건 연구에서 반복적으로 다뤄져 왔다. 동화 압력 속에서 낙인을 피하려는 정체성 관리, 문화적 피로, 상징적 경쟁이 ‘거리두기’를 만들 수 있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여론이 요구하는 건 “미국 회사냐 한국 회사냐”가 아니다. 한국에서 3,300만명 규모의 개인정보 이슈가 터졌고, 국가적 분노가 생겼다면, 최종 책임자의 언어로 직접 설명하고 설득하는 장면이 필요하다는 요구다.
김범석을 둘러싼 논쟁은 결국 한 문장으로 수렴한다. 한국 시장에서 신뢰를 얻으려면, 글로벌 지배구조 위에서도 한국의 책임 규범을 ‘충분히’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규범의 수행이 보이지 않는 순간, 사람들은 '어떻게 쿠팡에서 자유로와질 것인가'를 궁금해 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