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퇴만 하면 숨 좀 돌릴 줄 알았다.” 정년 퇴직 후 2년. 통장 잔고는 줄어드는데, 고정지출은 그대로다. ‘은퇴 거지’라는 자극적 단어가 온라인에서 소비되지만, 현장에서 마주한 현실은 훨씬 구조적이었다. 은퇴 빈곤은 단발 사고가 아니라, 오랜 기간 쌓인 선택과 제도의 빈틈이 맞물리며 만들어지는 ‘경로 의존’의 결과였다.
통계가 먼저 경고한다. 통계청 ‘고령자통계’는 66세 이상 은퇴연령층의 상대적 빈곤율이 2022년 39.7% 수준임을 보여준다. 2023년 기준으로도 39%대가 이어진다는 분석이 뒤따른다.
은퇴 빈곤의 출발점은 ‘연금의 빈칸’이다. 비정규·프리랜서·자영업 구간이 길거나, 경력단절이 반복되면 가입기간이 끊기고 수급액도 얇아진다. 퇴직이 가까워질수록 뒤늦게 메우려 하지만, 공백이 길수록 비용은 커지고 효과는 제한적이다. 결과적으로 은퇴 직후 “월 현금흐름(regular cashflow)”이 예상보다 작게 형성된다.
두 번째 갈림길은 퇴직금·퇴직연금의 사용 방식이다. 제도는 커졌지만, ‘연금화’가 자동으로 보장되진 않는다.
2024년 퇴직연금 적립금은 431조 원대로 늘었고(전년 대비 12.9% 증가), 가입 근로자도 증가했다. 그러나 도입률을 보면, 제도 도입 대상 사업장 중 실제 도입은 26.5% 수준으로 나타난다. “퇴직연금이 있는 사람” 자체가 아직 충분히 넓지 않다는 뜻이다.
더 큰 문제는 ‘중도인출’이다. 2024년 중도인출 금액은 2.7조 원으로 집계됐고, 사유는 ‘주택 구입’ 비중이 가장 컸다. 노후자금을 주거 문제 해결에 당겨 쓰는 순간, 은퇴 이후의 현금흐름이 훅 꺾인다.
고령층은 ‘자산 보유’와 ‘소득 빈곤’이 동시에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통계청 고령자통계는 고령자 가구의 순자산이 큰 규모로 형성돼 있음을 보여주지만, 상대적 빈곤율은 높게 유지된다.
즉, 집값이 올랐더라도 생활비 통장은 비어 있을 수 있다. 자산이 유동화되지 않으면 “월세·관리비·의료비”는 소득이 아니라 ‘저축 해제(자산 처분)’로 메워야 한다.

대출의 만기는 은퇴 시점에 맞춰 끝나지 않는다. 자녀 교육·주거 지원, 사업자금, 보증 등은 은퇴 이후에도 상환 압박을 만든다. 특히 보증은 “내가 갚지 않아도 된다”는 착각을 낳지만, 사고가 나는 순간 노후 생활은 즉시 붕괴한다.
고령자 의료비 부담은 꾸준히 증가해 왔다. 통계청 고령자통계는 65세 이상 고령자의 1인당 진료비와 본인부담금이 상승해 왔음을 보여준다.
노후 설계에서 ‘의료·돌봄’이 빠져 있으면, 퇴직연금·저축을 생활비가 아니라 치료비로 소진하게 된다.
은퇴 후 재취업은 늘지만, 양질의 일자리는 제한적이다. 결국 단기·저임금 일자리로 이동하며, 월 현금흐름을 회복하지 못한 채 체력만 소진하는 경우가 흔하다. 상대적 빈곤율이 높은 구조에서 ‘연금+노동’이 결합돼도 생활 안정으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다.
취재 과정에서 공통으로 확인된 장면은 단순했다. 은퇴 직전까지 가계부는 ‘월급 기반’으로 설계돼 있었고, 은퇴 직후 ‘연금 기반’으로 재설계되지 않았다. 지출 구조조정, 주거 전략, 의료·돌봄 비용, 세금·보험료 변화가 한 번도 시뮬레이션되지 않은 상태에서 은퇴가 시작됐다.

국민연금+퇴직연금+개인연금이 있어도, 연금 수령 타이밍과 방식이 맞지 않으면 월 현금흐름이 비게 된다. 은퇴 첫 5년(지출이 큰 구간)을 버틸 브릿지(bridge) 현금흐름을 먼저 설계해야 한다.
중도인출이 주택 구입·임차 사유에 집중돼 있다는 통계는 명확한 신호다. “집 문제를 퇴직연금으로 해결”하는 전략은 은퇴 이후를 담보로 현재를 사는 방식이 되기 쉽다.
자산 규모보다 중요한 건 유동성이다. 다운사이징, 임대수익, 주거비 고정화(전·월세 구조 재점검), 필요 시 공적 제도 활용까지 포함해 “집이 생활비를 만드는 구조”를 검토해야 한다. (단, 상품·제도 선택은 개인 상황에 따라 위험이 달라 전문가 상담이 필요하다.)

보증은 원칙적으로 금지에 가깝게 두고, 가족지원은 “정해진 예산 내에서만” 집행하는 규칙이 필요하다. 노후에서 가장 비싼 실수는 ‘좋은 의도’로 만든 장기채무다.
고령층 의료비 부담 증가 추세는 이미 통계로 확인된다. 실손·건강보험·장기요양 가능성, 만성질환 비용을 ‘변수’가 아니라 ‘필수항목’으로 가계부에 넣어야 한다.
은퇴 직전 36개월은 리허설 기간이다. 월급이 들어온다는 가정 없이, 연금·이자·임대·파트타임 등으로만 6개월을 운영해 보면 구멍이 드러난다. 이 리허설이 ‘은퇴 후 공포’를 ‘은퇴 전 조정’으로 바꾼다.
퇴직연금 시장은 400조 원을 넘겼고 제도는 계속 커진다. 하지만 은퇴 빈곤은 여전히 높다.
결국 갈림길은 하나다. 노후자금을 ‘자산(wealth)’으로만 보느냐, 매달 쓰는 ‘현금흐름(cashflow)’으로 전환해 관리하느냐. 은퇴 거지는 어느 날 갑자기 생기지 않는다. 대부분은, 점검하지 않은 채 맞이한 은퇴가 만든 필연의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