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의사 진단 무시하고 챗GPT 켠 17세… 희귀 신경질환 찾아 목숨 건졌다
영국에서 17세 청소년이 동네 주치의(GP)의 오진을 뒤로 하고, 인공지능(AI) 챗봇 ‘챗GPT’를 통해 자신의 희귀 신경 질환을 스스로 찾아내 목숨을 건진 사례가 현지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의료진도 뒤늦게 이를 확인하며 “네가 맞다”는 말을 남겼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카흘런 일스 = 더 썬 인용감기인 줄 알았는데, 발이 파랗게 변했다
영국 잉글랜드 서남부 글로스터셔(Gloucestershire)에 사는 카흘런 일스(Kahlan Eales·17)는 몇 주 전 독감 같은 증상으로 지역 의원을 찾았다. 감기 이후로 기운이 전혀 돌아오지 않고, 일상생활이 힘들 정도로 피로와 쇠약감이 계속됐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증상이 심해졌다는 점이다. 발이 푸르스름하게 변색되고, 다리 힘이 빠져 움직이기 어려워지고, 전신 힘이 급격히 떨어지는 양상이 나타났다. 그럼에도 동네 의원을 찾았을 때 의사는 혈액순환장애의 일종인 ‘레이노 증후군(Raynaud’s syndrome)’이라고 설명하며, “따뜻하게 지내고 장갑을 끼라”는 생활요법만 권했다.
일스는 “단순히 손발이 찬 정도가 아니라, 몸이 점점 말을 안 듣는 느낌이었다”며 당시 불안을 털어놨다고 전해진다.
병원 진료를 마치고 여자친구 집에서 돌아오던 버스 안. 일스는 결국 스마트폰을 꺼내 챗GPT에 자신의 증상을 하나씩 입력하기 시작했다.
독감 이후 몇 주째 이어지는 극심한 피로, 다리의 근력 저하와 보행 곤란, 발이 파랗게 변하는 증상
등을 모두 적어 넣고 “무슨 병일 가능성이 있느냐”고 묻자, 챗GPT가 가장 먼저 제시한 진단 후보는 ‘길랭–바레 증후군(Guillain–Barré syndrome·GBS)’이었다.GBS는 우리 몸의 면역체계가 말초신경을 공격하는 희귀 자가면역성 신경 질환이다. 주로 감기·위장염 같은 감염성 질환 이후 수주 안에 팔다리 힘이 서서히 빠지고 감각이 이상해지며, 진행이 빠르면 얼굴·호흡근까지 마비가 올라갈 수 있다. 치료가 늦을 경우 호흡부전으로 이어질 수 있는 잠재적으로 치명적인 질환으로 알려져 있다.
일스는 현지 언론에 “검색 사이트에서 보던 설명보다 훨씬 구체적이었고, 내가 느끼던 증상과 하나하나 맞아떨어져서 소름이 돋았다”고 말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카흘런 일스 = 더 썬 인용
챗GPT의 결과를 확인한 뒤, 일스와 어머니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응급실(A&E)을 찾았다. 보도에 따르면 이들은 지난 11월 A&E에 도착해 동네 병원에서 내린 레이노 증후군 진단과 함께, 챗GPT가 제시한 ‘길랭–바레 증후군’ 가능성을 의료진에게 그대로 전달했다.
추가 검사와 신경과 전문의 진찰 결과, 병원 역시 GBS 진단을 확정했다. 의료진은 곧바로 브리스톨 로열 인퍼머리(Bristol Royal Infirmary)로 일스를 옮겨 혈장교환(plasma exchange) 등 국제 가이드라인에 따른 응급 면역치료를 시작했다. 이후 상태가 안정되자 글로스터셔 로열 병원(Gloucestershire Royal Hospital)으로 전원해 회복 치료를 받고 있으며, 곧 퇴원할 것으로 전해졌다.
일스는 “병원에서 ‘네가 맞다(you’re right)’라는 말을 들었을 때 믿기지 않았다”며 “정확한 진단을 받으려고 AI에 의지해야 했다는 사실이 지금도 이상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카흘런 일스는 글로스터셔 소재 시런세스터 칼리지(Cirencester College)에서 법학과 범죄학을 공부하고 있는 평범한 학생이다. 수업 과제나 일상적인 질문에 챗GPT를 자주 활용해 왔지만, 자신의 생명이 달린 문제까지 AI에 묻게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공고의료 시스템 전체에 대한 신뢰를 잃은 건 아니다. 하지만 우리 지역 병원에 대한 신뢰는 솔직히 많이 깨졌다”고 말했다.
이번 사례는 영국에서 꾸준히 지적돼 온 지역 병원 인력 부족과 짧은 진료 시간, 그리고 희귀 질환에 대한 1차 의료의 한계를 그대로 드러냈다는 평가가 뒤따른다.

이번 사건은 챗GPT가 의료 현장에서 ‘두 번째 의견(second opinion)’ 역할을 한 대표 사례로 기록되고 있다. 비슷한 일은 이미 다른 나라에서도 있었다. 올해 4월 미국에서는 4세 소년이 3년 동안 17명의 의사를 전전했지만 원인을 찾지 못하다가, 어머니가 챗GPT에 MRI 소견과 증상을 입력해 척수 희귀 질환인 ‘척수 견인 증후군(tethered cord syndrome)’ 가능성을 제시받고, 이후 전문의에게서 실제 확진을 받았다는 일이 보도됐다.
의학계에서는 대형 언어모델(LLM)이 방대한 텍스트 데이터를 학습한 덕분에, 사람 의사가 바로 떠올리기 힘든 희귀 질환이나 비전형적인 증상을 ‘후보 리스트’로 제시해 줄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러나 동시에 “성공 사례만 보고 AI를 과신하면 안 된다”는 경고도 거세다.
최근 생성형 AI 진단 연구 83편을 모아 분석한 한 메타분석에 따르면, 의료 진단 과제에서 AI 모델의 전체 정확도는 약 52.1%로 집계됐다. 비전문가 의사와는 큰 차이가 없었지만, 전문의와 비교하면 분명 뒤처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소아 진단만 따로 보면 상황은 더 냉정하다. JAMA Pediatrics에 실린 한 연구는 ChatGPT-3.5가 소아 증례 100건을 진단했을 때 정답률이 17%에 불과했다고 보고했다. 포브스는 이를 두고 “소아과 의사들이 흰 가운을 벗을 일은 당분간 없겠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챗GPT 같은 도구는 환자와 의사가 함께 쓸 수 있는 유용한 ‘참고서’가 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진단 주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며 “특히 소아·응급·희귀 질환의 경우, AI가 위험 신호를 던져 주더라도 최종 판단과 책임은 반드시 의료진에게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카흘런 일스의 사례는 환자가 더 이상 의사에게만 의존하지 않고, AI·온라인 커뮤니티·환자 단체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정보를 찾아 나서는 시대가 이미 시작됐음을 보여준다. 특히 예약이 어려운 영국 GP 시스템에서는, 환자가 AI를 통해 자신의 증상을 미리 정리해오고, 의료진과 함께 검토하는 장면이 앞으로 더 흔해질 가능성이 크다.
이번 사건은 우리에게 몇 가지 질문을 남긴다.
1차 의료 현장은 희귀 신경 질환 같은 위험 신호를 얼마나 잘 가려내고 있는가, 환자가 “AI가 이런 병일 수 있다고 한다”고 말할 때, 의료진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화에 녹여야 하는가, AI의 ‘기적 같은 성공 사례’와 동시에, 조용히 사라지는 수많은 실패 사례는 어떻게 균형 있게 전달할 것인가
챗GPT의 한 줄 진단 덕분에 가까스로 시간을 번 17세 청년은 지금도 재활을 이어가고 있다. 그의 스마트폰 화면에 떴던 그 문장은, AI가 의사를 대신하는 시대가 아니라, AI를 잘 활용하는 환자와 의사가 함께 진단의 정확도를 높이는 시대가 오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