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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타임스×시한책방 서평] 설탕의 역사 (이성규 PD) : 설탕 한 알에 숨은 제국과 노예의 역사, 그리고 우리의 오늘
  • 서지원 문화 & 전시 전문기자
  • 등록 2025-12-11 10:19:08
  • 수정 2025-12-11 10: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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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양 학자가 아닌, 한국 PD가 쓴 설탕 세계사
  • 젠틀맨·노예·해적이 움직인 설탕 제국의 구조
  • 하와이 사탕수수밭과 사진 신부, 우리의 역사가 되다


설탕 한 알에 숨은 야만의 세계 – 이성규 『설탕의 역사』 서평

이성규 PD의 『설탕의 역사 – 설탕 알갱이 한 알에 담긴 달콤한 ‘야만’을 넘어서』는 설탕 세계사, 노예무역, 하와이 이민사, 삼성 설탕 사업까지 한 번에 엮어내는 인문 교양서다. ‘설탕의 역사 서평’을 찾는 독자, ‘설탕의 세계사’나 ‘설탕의 제국’ 다큐가 궁금했던 독자라면 이 책 한 권으로 설탕이 어떻게 제국을 만들고, 한국인의 삶과 오늘의 자본주의까지 바꾸어 놓았는지 입체적으로 따라가 볼 수 있다.

무심코 커피에 타 넣는 하얀 설탕이 사실은 노예무역, 식민지 지배, 산업혁명, 그리고 한국인의 하와이 이민과 삼성의 성장 서사까지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은 집요하게 보여준다. 달콤함의 원료가 이렇게 씁쓸할 수 있나 싶은, 좀 기묘한 독서 경험이 기다리고 있다.


다큐 〈설탕의 제국〉에서 탄생한, 한국인의 시선으로 쓴 ‘설탕 세계사’

『설탕의 역사』는 부산 MBC에서 방영된 4부작 다큐멘터리 〈설탕의 제국〉을 기획·연출한 이성규 PD가 수년간의 취재와 세계 현장 탐사를 책으로 다시 엮어낸 작업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가나·남아프리카공화국·미국 하와이·자메이카·쿠바·영국 등 10여 개국을 돌며 설탕이 세계를 어떻게 움직여 왔는지 추적했고, 그 공로로 휴스턴 국제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했다.

책 소개 그대로, 이건 단순한 자료 정리가 아니라 “현장 보고서”에 가깝다. 설탕 창고의 먼지 냄새, 사탕수수 밭의 뜨거운 공기, 하와이 이민자 후손들의 얼굴까지, 화면으로 보던 장면들이 글 속에서 다시 살아난다. 그래서 이 책은 “서양 학자가 쓴 설탕 문명사”가 아니라, 한국인이 카메라를 들고 세계 곳곳을 직접 걸어 다니며 보고, 듣고, 묻고, 받아 적어 온 기록처럼 읽힌다.



설탕이 만든 제국 – 젠틀맨, 노예, 그리고 해적

이 책이 설탕 제국을 설명하기 위해 세운 축은 세 부류의 사람이다. 응접실에서 차와 함께 설탕을 우아하게 즐기던 유럽의 젠틀맨, 사탕수수 농장에서 죽도록 일하며 설탕 제국을 떠받친 수많은 아프리카 노예, 그리고 삼각무역의 배를 털며 지배 시스템에 균열을 낸 해적.

책은 영국이 면직물을 싣고 아프리카로 가서 사람을 사고, 노예를 가득 실은 배가 카리브해와 남·북미의 사탕수수 농장으로 향한 뒤, 다시 설탕을 싣고 유럽으로 돌아오는 삼각무역의 구조를 차근히 짚는다. 설탕 한 알이 20배의 수익을 남기던 시절, 달콤함을 누리는 소비자와 그 달콤함을 위해 노동하던 사람의 얼굴은 철저히 분리돼 있었다는 사실이 반복해서 강조된다.

그 과정에서 책은 부두교·레게·럼주 같은 문화적 유산도 놓치지 않는다. 부두교는 강제로 아메리카로 끌려온 아프리카인들이 자신들의 종교를 포기하지 않고 지켜낸 흔적이고, 레게는 사탕수수 밭의 노동요에서 시작된 음악이며, 럼주는 해적과 선원들의 술이다. 이성규 PD는 이 문화들이 단순한 ‘BGM’이 아니라, 설탕 제국의 폭력과 억압에 맞서 인간이 만들어 낸 저항과 생존의 방식이었다는 점을 차분히 보여준다.

흥미로운 대목은, 이 부두교의 “좀비” 개념이 훗날 대중문화로 확산돼 한국의 K-좀비 콘텐츠까지 이어진다는 연결이다. 책은 〈킹덤〉, 〈부산행〉, 〈지금 우리 학교는〉 같은 작품들을 통해, 설탕이 남긴 “좀비 상상력”이 어떻게 21세기 한국 드라마와 영화의 흥행 동력이 되었는지 슬쩍 짚고 지나간다. 이 대목에서 독자는 설탕이 단지 경제와 정치만이 아니라, 문화와 상상력의 지형까지 바꾸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하와이 사탕수수밭, 사진 신부, 그리고 한국인의 이야기

이 책이 특히 한국 독자에게 각별하게 다가오는 부분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건너간 동아시아 이민자들, 그중에서도 한국인 1세대의 이야기다.

1900년대 초, 중국인·일본인을 거쳐 하와이로 향한 한국인 노동자들은 “노예는 아니지만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조건”에서 사탕수수 밭에 투입됐다. 임금은 낮고 노동은 고되었으며, 파업과 저항이 반복될수록 더 “말 잘 듣는” 새로운 노동력을 찾아 다른 아시아인들이 순차적으로 투입되는 구조가 이어졌다.

여기에 더해지는 것이 바로 ‘사진 신부’의 서사다. 하와이에서 신부를 구하기 어려웠던 이민 남성들이 고국에 사진 한 장만 보내 결혼 상대를 구하고, 그 사진만 믿고 태평양을 건너온 여성들이 실상은 20년 전 사진 속 청년이 아니라, 중노동에 찌든 40대 남편과 만나게 되는 이야기. 돌아갈 배도, 돌아갈 돈도 없어 광대한 사탕수수 밭 한가운데에 홀로 남겨진 소녀·여성들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버텨 내야 했던 시간은 책의 가장 먹먹한 부분 중 하나다.

그러나 『설탕의 역사』는 그들을 단지 비극의 피해자로만 그리지 않는다. 이성규 PD는 사진 신부들이 자녀 교육에 힘쓰고, 3·1운동 소식을 들은 뒤에는 부인구제회를 조직해 옷을 만들어 팔고 모금해 상하이 임시정부와 만주 독립군을 지원한 기록을 보여준다. 하와이 이민 역사가 “설탕 제국의 희생”이면서 동시에 “조국 독립을 떠받친 숨은 뿌리”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그리고 이 하와이 이민자들이 남긴 기억이 바로 오늘날 인천의 인하대학교, ‘인천 하와이 대학’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순간, 독자는 설탕의 세계사와 자신의 삶이 생각보다 훨씬 가까이 맞닿아 있다는 묘한 전율을 경험하게 된다.



설탕에서 삼성까지 – 달콤함 위에 세워진 근대

『설탕의 역사』의 문제의식은 단순하다. “설탕이 없었다면 지금의 세계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책은 영국 산업혁명의 자본이 공장이 아니라 사탕수수 농장에서 시작됐다는 점, 일본 메이지 유신의 재정적 토대 뒤에도 사탕수수와 설탕 산업이 있었다는 점을 차례로 짚는다. 그리고 한국 파트에서는 21세기 ‘반도체 제국’ 삼성 역시 1953년 제일제당을 세우고 국내 최초로 설탕을 생산한 사업이 그룹 성장의 출발점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왕조에서 근대 국가, 식민지와 제국주의, 그리고 재벌과 글로벌 기업에 이르기까지, 설탕은 늘 “보이지 않는 연료”로 작동해 왔다. 책의 부제처럼, 설탕 알갱이 한 알에는 달콤함과 함께 “야만의 역사”가 응축돼 있다.


끝나지 않은 설탕의 역사 – 오늘의 착취 구조를 비추는 거울

이 책이 흥미로운 이유는, 설탕을 “이미 끝난 과거의 이야기”로 놓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프리카에서 설탕은 한때 노예무역을 낳은 원인이었지만, 오늘날에는 또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의 몸과 삶을 침식하고 있다. 책은 서구에서 소비가 줄어드는 설탕 음료와 정크푸드가 아프리카와 개발도상국으로 흘러들어가 비만과 만성질환을 폭발적으로 늘리고, 그 과정에서 벌어들인 수익과 자본은 다시 북반구로 빠져나가는 구조를 지적한다.

아프리카는 과거에는 설탕을 생산하기 위해 사람을 “보내던” 곳이었다면, 이제는 설탕으로 만든 가공식품을 “받아 먹는” 곳이 되었다. 생산에서 소비로 역할은 바뀌었지만, 부와 건강의 불균형이라는 본질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책을 덮고 나면 자연스럽게 우리의 일상으로 시선이 옮겨온다. 배달 플랫폼을 통해 자신은 먹어보지 못할 비싼 음식을 실어 나르는 라이더, 남의 차를 대신 운전하면서 정작 자신은 그런 차를 살 수 없는 대리운전 기사, 인턴과 계약직 이름으로 정당한 보상 없이 소모되는 청년 노동자들…. 물건이 설탕에서 데이터, 음식, 이동 서비스로 바뀌었을 뿐, “남의 달콤함을 위해 누군가는 과도한 리스크를 떠안는 구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생각이 든다.



설탕을 한 번 의심해 보게 만드는, 묘하게 달콤 쓸쓸한 책

『설탕의 역사』는 단번에 읽어 내려가는 “가벼운 교양서”는 아니다. 대신 읽는 동안 계속해서 장면이 머릿속에 박힌다. 사탕수수밭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노래하던 노동자들, 사진 한 장만 들고 태평양을 건너온 18살 사진 신부, 설탕 창고를 털던 해적들, 그리고 설탕 공장으로 시작해 반도체 제국으로 성장한 재벌 그룹까지.

책은 독자에게 이런 질문을 남긴다.
“다음 문명은 설탕 제국처럼 누군가의 착취와 폭력 위에서 세워지지 않을 수 있을까.”

달콤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 자본주의가 과연 어디까지 괜찮은가”라는 질문을 마음 한켠에 품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은 꽤 오래 여운이 남는 독서가 될 것이다. 커피에 설탕을 한 스푼 넣는 순간마다, 그 작은 알갱이 너머의 세계를 한 번쯤 떠올리게 만드는 책. 그런 의미에서, 『설탕의 역사』는 달콤함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건네는, 아주 정직한 쓴맛에 가까운 서평 대상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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