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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 출근도 해고 사유? .. 매일 조기 출근한 스페인 여성의 황당한 결말
  • 우경호 커리어 전문기자
  • 등록 2025-12-11 09:5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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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실한 직원”인가, “회사 규칙을 무시한 직원”인가를 가른 법원의 시각
  • 반복된 경고와 근태 시스템 기만, 법원이 본 해고의 진짜 이유
  • 개인의 열정 vs 조직의 규칙, 어디까지가 ‘허용된 성실함’인가


매일 새벽 6시 45분 출근한 22살, 돌아온 건 ‘징계 해고’

스페인 동부 도시 알리칸테의 한 물류·배송 회사에서 일하던 22살 여성 A씨.
그녀의 근무 시작 시간은 오전 7시 30분이었지만, 실제 출근 시간은 늘 그보다 훨씬 빨랐다. 거의 매일 아침 6시 45분에서 7시 사이, 정해진 시각보다 30~45분 일찍 회사에 도착했다.

많은 직장 문화에서라면 “성실한 인재”로 칭찬받을 법한 이 습관은, 그러나 A씨에게 전혀 다른 결과를 안겼다. 회사는 그녀에게 “정해진 시간 전에 나오지 말라”고 수차례 구두 경고를 했고, 2023년에는 공식 서면 경고까지 남겼다. 그럼에도 A씨는 관행처럼 이른 출근을 이어갔고, 서면 경고 이후에도 최소 19번 더 일찍 출근한 사실이 기록으로 남았다.

결국 회사는 ‘중대한 비위(serious misconduct)’를 이유로 징계 해고를 단행했고, A씨는 부당하다며 소송을 제기했지만 알리칸테 사회법원은 회사의 손을 들어줬다.


“문제는 성실함이 아니라, 수차례 경고를 무시한 불복종”

사건이 외신과 SNS를 통해 퍼지자, 많은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려고 일찍 나간 게 왜 해고 사유냐”며 고개를 갸웃했다. 겉으로만 보면 ‘성실한 직원 vs 까다로운 회사’의 구도처럼 보이기 쉽다.

하지만 판결문과 현지 보도를 종합해 보면, 쟁점은 ‘일찍 출근’ 그 자체가 아니라 회사의 정당한 지시를 반복적으로 어긴 ‘지속적인 불복종’에 있었다.

스페인 「노동자 규정(Estatuto de los Trabajadores)」 제54조 2항은 징계 해고 사유로 상습적·무단 결근이나 지각, 회사의 합리적 지시에 대한 노골적인 불복종, 회사 재산 및 신뢰를 해치는 행위
등을 명시하고 있다.

법원은 이번 사건에서 다음과 같은 점을 중대 위반으로 봤다.

  1. 회사가 “정해진 시간 전에 출근하지 말라”고 여러 차례 구두·서면으로 경고했음에도, 노동자가 이를 무시하고 반복적으로 일찍 출근한 점, 회사의 근태 관리 앱을 이용해 실제로는 사무실을 떠난 이후에 퇴근 시간을 기록하는 등, 출퇴근 시스템을 기만한 점, 회사 차량의 중고 배터리를 상사의 승인 없이 폐차장에 판매한 행위

법원은 이런 일련의 행동이 “회사와 근로자 간의 신뢰와 충성의 관계를 현저히 훼손하는, 중대한 불성실·불복종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즉, 재판부가 본 핵심은 “너무 성실해서 문제”가 아니라
“하지 말라고 여러 번 말했는데도, 계속해서 규정을 어겼다”는 점이었다.


왜 회사는 ‘일찍 나오는 것조차 금지’했을까

그렇다면, 회사는 왜 굳이 “일찍 나오지 말라”고까지 했을까.
현지 보도와 판결 내용을 보면, 이 여성의 업무 특성상 혼자 먼저 나와서는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 중요한 배경으로 등장한다.

알리칸테의 이 물류 회사는 여러 직원이 동시에 교대에 들어와야만 작업이 돌아가는 구조였다. 여성 직원이 혼자 먼저 도착해도, 다른 동료가 출근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상품 분류·배송 준비 등 본격적인 업무를 시작할 수 없었다.

회사 입장에서 보면, 아직 근무 시간이 시작되지 않았고 실제 업무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특정 직원이 혼자 미리 들어와 근태 시스템을 찍거나, ‘나는 이미 일하고 있다’는 모양새만 만드는 것은 조직 관리 측면에서 불필요한 혼선이었다.

또한 다른 직원들은 정해진 시각에 맞춰 출근하는데, 한 사람만 혼자 늘 먼저 회사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팀 운영·교대 규율에 균열을 낼 수 있다는 점도 회사는 문제 삼았다. 한 노동법 전문 변호사는 이 사건을 두고 “회사 규칙이 합리적으로 공지된 상태에서 반복적으로 이를 어기면, 그것이 ‘일찍 출근’이든 ‘늦게 출근’이든 결국은 같은 근태 위반”이라고 설명한다.


스페인 노동법이 말하는 ‘신뢰’와 ‘시간’의 경계

스페인에서 징계 해고가 인정되려면,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계속 반복되고, 경고에도 고쳐지지 않는 중대한 위반”이어야 한다는 것이 법원의 일관된 입장이다. 이번 사건에서도 법원은 2023년부터 이어진 경고, 그 이후 최소 19차례의 반복, 근태 앱 기만과 회사 재산 무단 처분, 이 세 가지를 묶어 “신뢰 관계를 깰 정도로 심각한 패턴”이라고 규정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판결문이 “과도한 시간 엄수(excessive punctuality)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라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는 것이다. 법원이 문제 삼은 것은, 정해진 근무 시간과 회사 지침을 무시한 채 ‘내가 정한 리듬대로’ 움직인 태도였다.

근로 시간은 노사 합의와 계약, 그리고 법률로 규율된다.
그 시간 안에서 회사는 인력 배치·업무 협업·안전 책임을 지고, 노동자는 그 시간에 맞춰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하는 구조다.

이 틀을 근로자 쪽에서 멋대로 앞당기거나 바꾸는 순간, 회사 입장에서는 “우리가 책임져야 할 시간과 공간 밖에서, 우리 시스템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이 생기게 된다. 이번 판결은 그 지점을 ‘신뢰와 관리의 균형’ 문제로 본 셈이다.


한국 직장에 던지는 질문: ‘과한 열정’과 ‘규범 위반’의 기묘한 경계

한국의 직장 문화에 이 사건을 대입해 보면, 여러 생각거리가 생긴다.
야근, 선출근, 눈치 출퇴근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는 한국에서는, “매일 40분 일찍 출근해서 해고당했다”는 제목만 보면 “우리나라랑은 반대네?”라는 반응이 먼저 나올 법하다.

하지만 스페인 사례를 조금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 ‘열심히 한다’는 이름으로, 회사가 정한 기준과 규칙을 마음대로 바꾸는 건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을까.

  • 상사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여러 번 말했는데도 계속한다면, 그것은 여전히 ‘성실함’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 업무 시간과 공간을 관리해야 하는 주체가 회사라면, ‘내가 정한 시간에 미리 나가서 일하겠다’는 개인의 의지는 어디까지 존중받을 수 있을까.

이번 판결은 ‘일찍 출근’이라는 상징적인 에피소드 뒤에 숨어 있던, 규범·신뢰·업무 통제권의 문제를 드러낸 사건이라고도 볼 수 있다.

“늦게 와도 문제, 너무 일찍 와도 문제”라는 말이 우스갯소리처럼 들릴 수 있지만, 노동법의 언어로 번역하면 이렇게 정리된다. “회사와 약속한 시간과 방식 안에서 성실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 약속을 벗어난 ‘과한 열정’은, 때로는 성실함이 아니라 규범 위반이 될 수 있다.”

스페인 알리칸테의 한 젊은 여성 노동자가 남긴 이 판례는, 한국 직장인들에게도 “내가 생각하는 성실함”과 “조직이 요구하는 규칙”의 간극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만드는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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