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대 문자를 해독하는 것 같다.” 영국 BBC가 한국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영어 난이도 논란을 조명하며 전한 수험생들의 반응이다. BBC는 2026학년도 수능 영어 지문 일부를 기사에 직접 제시하고 “풀어보라”는 식으로 독자 참여까지 유도했다. ‘불영어’ 논쟁이 국내를 넘어 해외에서까지 화제가 된 배경이다.
이번 논란은 단순히 “어렵다”는 불만을 넘어, 영어 영역이 무엇을 평가해야 하는지, 그리고 ‘절대평가’라는 제도 취지와 실제 시험 운영이 얼마나 어긋났는지라는 구조적 문제로 번지고 있다.
핵심은 결과다. 11월 13일 치러진 수능 영어에서 1등급(90점 이상) 비율이 3.11%로 떨어졌다. 영어는 2018학년도부터 절대평가 체계인데, 1등급 비율이 상대평가 상위 4% 기준보다도 낮아지면서 “사실상 상대평가처럼 변질됐다”는 비판이 거세졌다.
혼란이 커지자 한국교육과정평가원(평가원) 원장이 중도 사임했고, 교육부는 출제·검토 과정 전반에 대한 조사에 착수하겠다고 밝혔다. 교육부는 “적정 난이도와 학습 부담 경감 목표에 부합하지 못했다”는 취지의 사과와 함께, 난이도 조정 절차 보완과 현장 교사 중심 검토 강화 등을 개선 방향으로 언급했다.
논란이 집중된 문항들은 철학·게임·시간 같은 추상 주제를 다뤘다. BBC 보도에서도 칸트 등 정치·법철학 논지가 등장하는 지문, 비디오게임 아바타의 존재를 묻는 지문 등이 소개됐고, 국내에서도 “단어 선택과 문장 구조가 지나치게 난해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하지만 교육 현장의 불만은 “어려운 주제라서”라기보다 시험 문장 자체가 ‘독해력 평가’를 넘어 ‘해석 퍼즐’이 됐다는 데 쏠린다. 예컨대 생소한 조어·표현이 등장하거나, 일상적 영어 글쓰기 규범과 거리가 있는 문장 구조가 반복되면, 실질적으로 측정되는 능력은 ‘영어 실력’이라기보다 ‘시험형 문장에 대한 적응’이 된다. 실제로 해외 보도는 시험에 등장한 ‘culturtainment’ 같은 표현이 혼란을 키웠고, 해당 용어를 만든 학자조차 “시험에 나올 표현이 아니다”라는 취지로 반응했다고 전했다.

또 하나의 구조적 문제는 사교육 문항을 피하려는 과정이 난이도 폭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평가원 측 설명으로 전해진 바에 따르면, 출제 과정에서 사설 모의고사와 유사한 문항을 발견해 일부를 변경했는데, 그 과정에서 특정 문항의 난이도를 제대로 재평가하지 못했다는 취지의 발언이 나왔다. T
사교육 의존을 줄이겠다는 정책 목표 자체는 타당하다. 그러나 “비슷하면 바꾼다”는 방식이 반복되면, 문항은 점점 더 ‘새로운 형태’에 집착하게 되고, 그 ‘새로움’이 교육과정의 범위를 벗어나거나 문장 설계를 과도하게 꼬이게 만들 수 있다. 결과적으로 사교육은 ‘새 유형 대비’로 다시 팽창하고, 공교육은 뒤쫓는 악순환이 만들어진다.
수능 영어가 지나치게 ‘문해력 퍼즐’에 가까워질수록, 학생들이 실제 영어 의사소통 능력을 키우는 데 쓰는 시간은 줄고, 정답을 맞히기 위한 기술 훈련이 늘어난다. 이 과정에서 격차는 커진다. 고난도 지문과 함정형 선택지를 상대하는 훈련은 결국 시간·자료·코칭이 필요한데, 이는 가정 배경과 지역, 사교육 접근성에 따라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또 수능이 갖는 사회적 무게가 워낙 큰 만큼, 공정성 논란은 ‘시험 한 과목’에 그치지 않는다. 해외 언론들도 한국 수능을 “사회적 이동과 경제적 안정의 관문”으로 묘사하며, 영어 듣기 시간에 항공편까지 조정될 정도로 국가가 멈추는 날이라는 점을 함께 전했다. 이런 시스템에서 “절대평가 과목이 3%만 1등급”이면, 수험생이 느끼는 제도 신뢰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이번 BBC 보도가 국내에 던진 메시지는 단순하다. “한국 수능 영어가 어렵다”가 아니라, 그 어려움이 ‘교육적으로 정당한가’라는 질문이다.
정리하면, 수능 영어의 문제점은 크게 세 갈래다.
첫째, 절대평가 취지와 결과가 충돌하면서 제도 신뢰를 흔들었다.
둘째, 독해 평가가 ‘비자연적 문장·생소한 표현’의 퍼즐로 변질될 경우 학습이 왜곡된다.
셋째, 사교육 회피 전략과 난이도 조절 실패가 맞물리면 공정성·격차 문제가 커진다.
이제 남은 건 조사와 재발 방지 대책이다. 교육부가 예고한 출제·검토 과정 조사 결과가 ‘문항 몇 개’의 문제가 아니라, 절대평가 영어가 어떤 능력을 어떤 수준에서 측정할지라는 원칙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 그 결론이 시험장 밖의 진짜 논쟁이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