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월 11일, 네 개의 ‘1’이 나란히 선 날짜. 숫자 ‘1’의 모양을 닮은 과자 ‘빼빼로’를 주고받는 ‘빼빼로데이’는 이제 한국의 대표적인 문화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1990년대 중반, 제과회사의 마케팅에서 출발한 이 날은 처음에는 “날씬해지길 바란다”는 의미로 친구들끼리 과자를 주고받던 청소년들의 유행이었지만, 어느새 세대를 넘어 사랑과 우정을 나누는 ‘감정의 기념일’로 확장되었다.
1996년 연합뉴스의 보도를 통해 대중에게 처음 소개된 빼빼로데이는 1997년 롯데제과가 무료 증정 행사를 열면서 전국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편의점과 마트에는 11월이 되면 다양한 ‘빼빼로데이’ 행사가 열리고, SNS에는 직접 만든 DIY 초콜릿 과자 사진이 올라오며 하나의 ‘참여형 문화’로 자리 잡았다.
상업적 기념일이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이미 빼빼로데이는 한국인의 일상 속에서 사랑과 정(情)을 전하는 방식으로 정착했다.
 일상 속 사랑과 정(情)의 표현으로 마케팅하는 빼빼로 (사진:롯데제과)
일상 속 사랑과 정(情)의 표현으로 마케팅하는 빼빼로 (사진:롯데제과) 
흥미로운 점은, 이 문화가 이제 국경을 넘어 K-컬처의 한 장면으로 확장되었다는 것이다.
2014년 통계에 따르면 빼빼로데이를 앞두고 한국 과자를 온라인으로 구매한 외국인 소비가 전월 대비 160% 이상 늘었다.
2022년에는 몽골과 말레이시아의 편의점에서도 빼빼로데이 행사가 열렸고, 한국 문화를 체험하는 ‘K-데이 이벤트’로 현지의 관심을 끌었다.
제조사인 롯데웰푸드는 2023년 K-팝 그룹 뉴진스를 공식 홍보대사로 선정하여 SNS를 통해 전 세계 17개국에서 홍보 콘텐츠를 공개했다.
이처럼 ‘11월 11일’은 단순한 마케팅을 넘어, 한국의 ‘일상 감정’을 세계로 확산시키는 문화 코드가 되었다.
하지만 빼빼로데이의 진짜 변화는 오프라인보다 온라인 공간에서의 ‘감정 교환 방식’의 진화에 있다. 예전에는 손편지와 함께 직접 과자를 건네던 문화였다면,
이제는 ‘카카오 선물하기’, ‘편의점 픽업쿠폰’과 같은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클릭 한 번으로 마음을 전한다.
AI 추천 알고리즘은 상대의 관심사나 메시지 기록을 분석해
“이 사람에게 어울리는 선물”을 제안하고, SNS에서는 다양한 해시태그 이벤트 등으로 서로의 ‘달콤한 마음’을 나눈다.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던 감정이 이제는 데이터와 코드의 흐름 속에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카카오 선물하기의 빼뺴로데이 선물세트 (사진: 카카오 선물하기)
카카오 선물하기의 빼뺴로데이 선물세트 (사진: 카카오 선물하기)
AI 시대의 감정 표현 방식은 플랫폼을 통해 재구성되고 있다.
플랫폼은 사용자들의 구매 패턴, 메시지 빈도, 시간대 데이터를 학습하여 선물 추천을 자동화한다. 인간의 감정이 알고리즘 속에서 ‘예측 가능한 행동 데이터’로 전환되면서, ‘사랑의 표현’도 데이터화된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은 ‘누군가를 생각하는 마음’이다.
디지털 기술이 감정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정의 전송 방식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것이다.
한편, 11월 11일은 본래 ‘농업인의 날’이기도 하다.
정부와 공공기관은 상업적 이미지가 강한 ‘빼빼로데이’ 대신, 같은 모양의 전통 간식인 ‘가래떡’을 나누는 ‘가래떡데이’를 함께 알리고 있다.
흥미롭게도 ‘가래떡’과 ‘빼빼로’는 모두 길쭉한 모양을 하고 있다.
하나는 한국의 전통 농경문화를, 다른 하나는 현대 소비사회를 상징한다.
그리고 오늘날의 ‘빼빼로데이’는 그 두 세계가 디지털 네트워크 안에서 공존하는 문화적 접점이 되고 있다.
 가래떡 데이 광고 (사진:메고지고)
가래떡 데이 광고 (사진:메고지고)
AI가 선물 추천을 대신하고, SNS가 마음의 메시지를 확산시키는 시대.
그러나 여전히 11월 11일이 기다려지는 이유는 단순하다.
누군가를 떠올리며 작은 과자와 가래떡을 준비하고, 메시지를 건네고, ‘좋아요’를 누르는 그 모든 행위가 인간적 관계를 이어주는 또 하나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AI 시대의 빼빼로데이는 결국 인간이 기술을 통해 ‘정(情)’을 확장해 가는, 가장 달콤한 알고리즘의 날이라 할 수 있다.
글: 천수연(서울사이버대학교 한국어교육학과 대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