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16일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 소송에서 2심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2심이 인정한 재산분할금 1조3808억1700만 원과 위자료 20억 원이 그대로 확정되지 않고, 재산분할 산정 방식부터 다시 따져야 한다는 판단이다.
이번 판결로 8년째 이어진 ‘SK 부부의 이혼 소송’은 다시 원점에서 심리하게 됐다.
대법원 제1부(주심 서경환 대법관)는 이날 선고공판에서
“재산분할액 산정 과정에서 법리 해석이 미흡했고 일부 증거 판단이 불명확하다”며 2심 판결을 파기환송했다.
선고는 대법원 1부(소부)에서 진행됐지만, 재산 규모와 쟁점의 복잡성을 고려해 전원합의체 논의가 사전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재판부는 SK㈜ 주식의 특유재산 여부, ‘선경 300억 원’ 등 외부자금 유입 주장, 배우자의 가사노동 및 기여도 인정 범위 등 핵심 쟁점을 다시 심리하라는 취지로 판단했다.
이는 2심의 금액이 과도하게 산정됐거나 법적 근거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다고 본 것으로 해석된다.
최 회장과 노 관장은 1988년 결혼해 세 자녀를 두었다.
2015년 최 회장이 혼외자녀 존재를 공개하며 이혼 의사를 밝혔고, 2017년 이혼조정 신청이 불성립되면서 소송으로 이어졌다.
1심 재판부는 “SK그룹 주식은 고(故) 최종현 회장으로부터 증여·상속받은 특유재산이므로 재산분할 대상이 아니다”라고 보고 노 관장에게 위자료 1억 원과 재산분할금 665억 원만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그러나 2심은 1심을 뒤집었다.
SK그룹의 성장 과정에서 ‘선경 300억 원’으로 불린 외부자금 투입 정황과 노 관장의 가사노동·정서적 지원 기여를 근거로 재산 형성에 일정한 공헌이 있었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전체 재산 약 4조 원 중 35%를 분할 대상으로 보고, 최 회장이 1조3808억 원과 위자료 20억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 같은 판단의 법리적 근거와 증거의 신빙성, 기여도 평가 기준에 문제가 없었는지 다시 따져보라고 했다.
핵심은 SK㈜ 지분이 ‘결혼 전 상속·증여받은 개인 재산(특유재산)’인지, 혹은 ‘부부 공동 노력으로 가치가 상승한 자산’인지 여부다.
대법원은 이 부분의 법리 적용 기준을 명확히 다시 세워야 한다고 판단했다.
2심은 노 전 대통령 자금이 SK 성장에 쓰였다고 일부 인정했지만, 대법원은 해당 자금의 실체·유입 시점·인과관계가 불분명하다며 환송심에서 객관적 증거를 다시 검토하도록 했다.
노 관장의 가사노동과 정서적 지원을 기업 가치 상승의 기여로 평가할 수 있는지, 그 비율을 어떻게 정할지도 재심리 대상이다.
이는 향후 유사한 고액 재산분할 사건의 기준이 될 수 있어 주목된다.
대법원은 2심 판결문 내 일부 주식 가치 산정 및 표기 오류를 지적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SK 자회사 주식의 평가액 계산 오류와 비율 산정의 근거가 명확하지 않아 이를 환송심에서 다시 검증하도록 한 것이다.
이에 따라 재산분할 금액은 환송심 결과에 따라 크게 달라질 가능성이 높다.
일부 자산이 특유재산으로 인정되면 금액이 줄 수 있고, 반대로 배우자 기여가 폭넓게 인정되면 비슷한 규모가 유지될 수도 있다.
이번 판결은 한국 이혼소송 역사상 최대 규모의 재산분할 사건으로 기록될 전망이다.
특히 기업 상속지분을 부부 공동재산으로 볼 수 있는지, 배우자의 간접 기여를 어디까지 인정할지에 대한 법원의 기준을 다시 세우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법조계 관계자는 “대법원이 원심을 단순히 뒤집은 게 아니라, 기업 지분의 성격과 기여 인정 범위를 정교하게 정립하라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라며 “환송심 결과가 향후 대기업 총수 재산분할 소송의 새로운 잣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파기환송으로 최태원 회장과 노소영 관장의 이혼 소송은 다시 고등법원으로 돌아가게 됐다.
환송심 결과에 따라 재산분할 금액은 재조정될 전망이며, 최 회장이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SK 지분 일부 매각이나 담보 설정을 검토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법조계는 환송심 결과가 SK그룹의 지배구조 안정성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본다.
결국 이번 판결은 단순한 부부 간 재산분할이 아니라, 한국 사회가 ‘상속 재산과 공동 기여의 경계’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를 묻는 상징적 사건으로 남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