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급으로 거론돼 온(그리고 2015년 맨부커 인터내셔널을 수상한) 헝가리 작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데뷔작 <사탄탱고>는 독해의 난도보다 정서의 난도가 높은 소설이다. 문장은 길지만 의미는 분명하다. 힘겨운 건 세계관이다. 공허와 우울이 비처럼 내리는 마을, 선량함이 서식지를 잃은 인물들—악하거나, 약하거나, 역겹다. 보통의 소설처럼 “이 사람에게 마음을 싣고 따라가도 될까?”라는 이입의 닻을 내리려다, 독자는 닻줄이 허공을 긁는 감각에 오래 노출된다. 바로 그 불편이 이 작품의 힘이다. 우리가 사는 현실의 단면이 종종 그렇기 때문이다.
무대는 해체된 집단농장 마을. 사람들은 쥐여진 푼돈을 쥐고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망설인다. 탐욕, 음탕, 폭력, 기만이 일상 언어가 된 공동체에서 어린 소녀 에슈티케의 파국은 마을의 도덕적 사망신고처럼 울린다. 그리고 소문—죽은 줄 알았던 이리미아스가 돌아온다. 그는 메시아처럼 포장되지만 정부의 밀정이자 뛰어난 조종자다. 사람들은 스스로의 재산을 내어 맡기고, “새로운 공동체”의 꿈을 산다. 그러나 그들이 도달한 곳은 폐허의 또 다른 변주일 뿐, 구원은 애초부터 설계도에 존재하지 않았다.
작가는 종종 “헝가리의 카프카”로 불린다. 둘 모두 관료제의 부조리를 다루지만, 각도가 다르다. 카프카의 인물들은 거대한 체제의 문턱에서 미끄러져나간 소외자라면, 라슬로의 인물들은 이미 붕괴된 체제의 잔해 위에서 방황한다. 체제의 벽에 부딪히는 대신, 벽 자체가 무너져 먼지가 된 세계—그것이 라슬로가 ‘지옥’을 철학적으로 묘사하는 방식이다.
<사탄탱고>는 12장으로 구성된다. 1부(6장)는 앞으로, 2부(6장)는 역행한다. 탱고의 스텝처럼 “여섯 보 전진, 여섯 보 후퇴”. 이야기 한가운데, 술집의 탱고판이 벌어지는 순간은 희망처럼 보이나 동시에 불온한 광란이다. 같은 시각 에슈티케는 세상을 떠난다. 환희의 리듬과 절망의 사건이 서로를 비추며, 작품은 제목 그대로 “사탄의 탱고”를 완성한다. 마지막 장의 이름은 명징하다—“원이 닫히다.” 전진 또한 퇴행이었음을,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반복의 족쇄였음을 선언한다.
이리미아스(예레미야의 헝가리식 표기)와 페테르(베드로)라는 이름의 페어는 “예언자와 사도”의 반전된 패러디다. 라슬로의 세계에서 그들은 구원의 매개가 아니다. 이리미아스는 사람들을 등치고 해산시키며, 그들을 서로 감시하게 만든다. 그는 메시아를 가장한 관리자, 믿음을 수거하는 수금원이다. 정부에 낸 그의 보고서에는 혐오와 경멸이 뚜렷하다. 구세주가 아니라, 권력의 정교한 톱니바퀴.
교회도 종도 없는데 울리는 종소리, 어디서나 생겨나 사방을 뒤덮는 거미줄. 이 두 상징은 공동체의 운명을 말없이 압축한다. 종소리는 “의미가 사라진 의식”의 잔향이고, 거미줄은 “끊어도 다시 걸리는 구조”의 은유다. 마을의 사람들은 서로를 얽어매고, 얽힌 채 다시 흩어진다. 해체의 서사는 그래서 완전한 해방이 아니라, 더 미세한 통제와 더 교묘한 굴레로 귀결된다.
라슬로는 한 세계의 끝을 실제로 목도했다. 전후 헝가리의 사회주의 실험, 비효율과 권태, 80년대의 침체와 89년 체제 전환. <사탄탱고>(1985)는 해체 직후를 포착한다기보다, 해체가 ‘생활감’으로 스며든 시절을 기록한다. 창문을 판자로 틀어막고 기록에 몰두하는 닥터의 자폐적 몰두는 ‘세계의 소멸’ 앞에서 개인이 취할 수 있는 최후의 방어처럼 보인다. 라슬로의 지옥은 불과 유황이 아니라 “진척 없는 시간”과 “출구 없는 원”으로 이루어진 풍경이다.
라슬로는 오랫동안 노벨 문학상의 유력 후보로 호명돼 왔다. 실제로 트로피를 손에 쥔 것은 2015년 맨부커 인터내셔널(현 인터내셔널 부커상)의 본상—작가의 전체 업적에 대한 상이었다. 비평가와 예술가들이 먼저 알아보는 작가라는 별칭이 그를 따른다. 수전 손택의 열광, 심사위원장의 평처럼 “몽상적이면서도 섬뜩하게 웃긴” 장면들이 그의 세계를 이루지만, 독자에게 남는 건 웃음의 기억이 아니라 웃음 뒤의 침묵이다. 노벨상이 어느 날 그의 이름을 부르든 말든, 라슬로의 문학은 이미 “현대 묵시록 문학의 정점”이라는, 더 까다로운 독자들의 인준을 받았다.
1994년 벨라 타르는 원작의 리듬을 장엄한 롱테이크와 느림의 미학으로 번역했다. 여섯 보 전진과 후퇴의 형식적 아이디어는 화면의 전진과 후퇴—우리가 기어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카메라의 운행—로 다시 태어난다. 비평가들이 이 영화를 “매년 한 번 다시 보겠다”고까지 한 이유는, 미학적 숭고와 윤리적 피로가 보기 드문 균형으로 공존하기 때문이다. 책을 먼저 읽고 영화를 보면, 원의 닫힘이 어떻게 ‘시간의 체험’이 되는지 더 선명하게 체감된다.
공동체의 붕괴를 넘어, 기술이 인간의 조건을 재정의하는 시대에 <사탄탱고>는 아이러니하게도 ‘시대의 책’이 된다. 무엇을 믿을 것인가, 누구를 따를 것인가, 희망은 무엇의 다른 이름인가—이 책은 명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희망은 종종 지배의 언어로 위장한다”는 불편한 사실을 반복해서 들려준다. 그럼에도 인간은 다시 희망을 발명한다. 아마 그게 인간의 결함이자 재능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비가 그치지 않는다. 독자의 기분도 함께 젖는다. 햇살 좋은 날, 마음의 체온이 적절히 높을 때 읽자. 문장은 길지만 리듬이 있다. 소리를 내어 읽으면 “탱고의 보폭”이 문장 사이에서 들린다. 때로는 멈춰 서도 된다. 탱고는 멈춤까지도 안무에 포함한다.
술집의 탱고판과 에슈티케의 마지막—희망과 파괴가 동시에 박자를 밟는다.
닥터가 창문을 판자로 봉하는 순간—세계를 끊어내려는 절박한 의식.
이리미아스의 보고서—구원 서사의 마스크 뒤에서 작동하는 냉소의 언어.
종소리와 거미줄—존재하되 비가시적인 지배의 상징.
<사탄탱고>는 ‘구원 서사’의 엔진을 분해해 식탁 위에 올려놓는 소설이다. 우리의 일상과 사회가 돌리는 희망의 기계가 어떻게 기만과 통제의 부품으로 쉽게 뒤집히는지, 라슬로는 탱고의 박자에 맞춰 잔혹하게 보여준다. 그럼에도 이 책은 단죄로 끝나지 않는다. 원이 닫히는 순간, 독자는 묻는다. “다시 한 번, 다른 스텝은 없을까?” 절망의 끝에서조차 질문을 포기하지 않는 그 지점이야말로, 라슬로가 말하는 인간의 ‘항구성’일지 모른다.
읽기는 어렵지 않다. 견디는 법을 배우는 책이다. 그리고 견딘 뒤엔, 우리가 믿고 싶은 이야기들을 한 번 더 시험대에 올려보게 만든다—그게 이 소설이 주는, 불편하지만 정직한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