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국지는 늘 “언젠가”의 책이었다. 책 읽는 사람이라면 결국 건너야 할 강이라는 걸 알지만, 막상 손에 쥐면 바다 같은 분량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박상률 완역 삼국지를 펼치면, 그 부담이 조금 다른 종류의 긴장으로 바뀐다. ‘빨리 읽히게’ 만든 삼국지가 아니라, 오래 남게 하려는 삼국지이기 때문이다.
이 완역본의 기조는 꽤 단호하다. 중국에서 신뢰받는 정본으로 알려진 『수상삼국연의』를 저본으로 삼고, 기존 번역에서 굳어진 오류를 바로잡겠다는 목표를 앞세운다. 그러다 보니 읽는 내내 ‘해석자의 삼국지’가 아니라 ‘원전의 삼국지’에 더 가까운 질감이 느껴진다. 독자가 호불호를 갖더라도, 판단은 독자에게 넘기는 방식이다.
삼국지의 문학적 결은 의외로 ‘시’에서 살아난다. 전투 장면의 기세도, 인물의 비애도, 시 한 줄이 붙는 순간 갑자기 고전의 호흡으로 바뀐다. 박상률 완역은 그 시와 노래를 “단 한 줄도 빠뜨리지 않고” 옮겼다. 덕분에 서사의 속도가 조금 느려질 때도 있지만, 대신 “고전이 고전인 이유”가 사라지지 않는다. 삼국지가 소설이면서 동시에 고전 문학이라는 사실을, 읽다 보면 이 시가 자주 상기 시킨다.

완역은 대개 무겁고, 고전 번역은 보통은 딱딱하다. 그런데 이 책은 문장이 의외로 빠르게 달린다. 한자말 위주의 번역 문체에서 벗어나 순우리말 중심으로 구성하려는 방향성이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대사가 더 ‘말’처럼 들리도록 손질된 덕분이다. 방대한 인물과 사건을 따라가야 하는 삼국지에서, 이 문장 감각은 생각보다 큰 체력 보조 장치가 된다.
이쯤에서 판본의 차이가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이문열 삼국지가 한국 독서 경험 속에서 유비를 ‘주인공’으로 만들었다면, 원전에 가까울수록 유비는 뜻밖에 “하는 일이 적은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공백을 채우듯 커지는 존재가 제갈공명이다. 삼국지의 그 수많은 캐릭터 중에, 제갈공명은 유독 결함이 적은 ‘완성형’으로 서술되며, 독자의 몰입은 자연스럽게 그에게 옮겨 간다. 그래서 어느 순간 삼국지는 유비전이 아니라 ‘제갈공명전’처럼 읽힌다.
삼국지의 최대 진입장벽은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인데, 이 완역본은 이를 편집적으로 완화한다. 각 권 시작 부분에 정사(正史)를 바탕으로 제작된 지도를 넣었고, 백남원 화백의 오리지널 일러스트가 장면마다 기품을 더한다고 소개된다. 덕분에 독자는 ‘이름의 홍수’에서 길을 잃기보다, 동선을 따라가며 관계를 기억하게 된다.
완역 삼국지는 친절하기 보다는 공정하다. 그리고 공정한 고전은, 읽는 사람의 눈을 바꾼다. 유비의 영웅담을 기대한 독자는 제갈공명의 전략을 보게 되고, 인물에 감정이입하던 독자는 시대의 흐름을 읽게 된다. 삼국지가 몇 번을 읽어도 새롭다는 말이, 이 판본에서는 조금 더 설득력을 얻는다.
박상률 완역 삼국지 세트 = 교보문고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