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떠나던 시대가 끝났다.”
직장 문화의 흐름이 급격히 바뀌고 있다. 팬데믹 이후, 근로자와 기업 사이의 관계는 세 단계의 변화를 거쳐왔다. ‘조용한 사직(Quiet Quitting)’으로 시작해 ‘요란한 해고(Loud Layoff)’로 옮겨갔고, 이제는 ‘잡 허깅(Job Hugging)’이라는 새로운 현상이 등장했다. 이는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불안정한 고용 환경과 AI 전환이라는 시대적 압력 속에서 인간과 일이 맺는 관계가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용한 사직’은 일을 그만두지는 않지만, 최소한의 일만 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2023년 갤럽 조사에 따르면 미국 근로자의 절반 이상이 이런 상태에 있는 것으로 추정됐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분위기가 감지된다. 회의에는 참석하지만 의견을 내지 않고, 지시에만 반응하는 이른바 ‘무난한 생존자’가 늘고 있다.
전문가들은 조용한 사직의 배경을 관리자 리더십 부재와 조직문화 피로에서 찾는다. 한 직장인은 “성과를 내도 보상은 없고, 책임만 늘어난다”며 “회사가 내 인생을 책임지지 않는데 왜 헌신해야 하느냐”고 말했다. 조용한 사직은 개인에게는 심리적 방어지만, 기업에는 조직 몰입의 붕괴로 나타난다.
조용한 사직이 개인의 침묵이라면, 요란한 해고는 기업의 외침이다. 2023년 이후 글로벌 IT기업들은 수만 명 규모의 감원을 진행했다. 아마존, 메타, 트위터(당시 X) 등이 대표적이다. 과거엔 조용히 진행되던 인력 구조조정이 이제는 CEO의 공개 서한, 실시간 SNS 폭로, 내부 직원의 이메일 공유 등을 통해 외부에 공개된다.
기업은 이를 ‘체질 개선’ 혹은 ‘효율화’라고 설명하지만, 남겨진 직원들은 불안감에 휩싸인다. “어제까지 함께 일하던 동료가 사라졌다”는 경험이 조직 전체를 위축시킨다. 내부 분위기는 냉각되고, 남은 사람들은 불안 속에서 일한다.
요란한 해고는 일종의 ‘투명성 시대의 폭력’이기도 하다. 경영진은 주주에게는 효율성을, 직원에게는 두려움을 동시에 전달한다. 그 결과, 조직의 신뢰는 빠르게 침식된다. 전문가들은 “AI 전환기의 구조조정이 단발적 해고가 아니라 산업 재편의 신호탄”이라며 “직장인들의 불안은 장기화될 것”이라고 분석한다.
이처럼 해고가 일상화되자, 일부 근로자들은 ‘떠나기보단 붙잡기’를 선택하고 있다. 잡 허깅(Job Hugging)은 자신이 만족하지 못하는 일자리라도 불안한 시장에서 안전을 위해 머무는 행태를 뜻한다. AI와 자동화가 빠르게 확산되면서 “지금 자리를 지키는 게 곧 생존”이라는 인식이 강해졌다.
하지만 잡 허깅은 개인의 커리어를 정체시키는 위험한 선택이기도 하다. 기술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될 가능성이 높다. 조직 전체로 보면 변화에 대한 저항 세력이 늘어나면서 혁신이 지체된다. 전문가들은 “잡 허깅이 조직의 좀비화를 부를 수 있다”고 경고한다.
조용한 사직, 요란한 해고, 잡 허깅 — 세 가지 현상은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지만 모두 AI 전환과 맞닿아 있다.
AI가 반복 업무를 대체하는 시대, 기업은 더 적은 인원으로 더 많은 효율을 원한다. 몰입도가 낮은 직원은 구조조정의 대상이 되고, 새로운 기술을 익히지 못한 근로자는 스스로 불안을 택한다. 반면, AI를 능숙하게 활용하는 직원은 조직 내 생존 가능성이 높아진다.
AI는 해고의 명분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기회의 문이기도 하다. 직업이 아닌 역량 중심의 경력 설계가 중요해진 이유다. 직무와 기술이 아닌 문제 해결 능력과 적응력이 커리어의 기준이 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기업과 개인 모두가 새로운 ‘일의 계약’을 맺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기업은 해고를 결정할 권한만큼, 남은 직원에게 재교육과 전환 기회를 제공할 책임이 있다. 단순한 인력 감축이 아니라, ‘재설계형 고용 구조’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개인에게는 잡 허깅 대신 스킬 허깅(Skill Hugging)이라는 태도가 요구된다. 직업보다 역량을 붙들고, AI 시대에 맞는 새로운 학습과 협업 방식을 익혀야 한다. 일자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일의 의미와 방식을 새로 설계하는 것이 핵심이다.
조용한 사직은 헌신의 붕괴였고, 요란한 해고는 신뢰의 붕괴였다. 그리고 잡 허깅은 성장의 붕괴다.
이제 일터의 다음 국면은, 누가 회사를 떠나느냐가 아니라 ‘누가 다시 일의 의미를 재정의하느냐’에 달려 있다.
AI 시대의 직장은 더 이상 안정된 공간이 아니다. 그 속에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새롭게 나아갈 것인가. 모두가 답을 찾아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