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의 대기업 편중 현상이 다시 한 번 수치로 확인됐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공시대상기업집단(자산 5조원 이상) 92곳의 매출은 2,007조7천억원으로, 명목 GDP(2,549조1천억원)의 78.8%에 달한다. 특히 삼성, 현대자동차, SK, LG, 롯데 등 5대 그룹의 매출은 1,025조원으로 GDP의 40%를 차지하며, 한국 경제가 대기업 중심의 ‘와인잔 구조’에 깊이 뿌리박혀 있음을 보여준다.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자산 11조6천억원 이상) 46곳의 매출은 1,833조1천억원으로, 대기업 매출의 91.3%를 점유했다. 이는 대기업 내에서도 상위 50%가 경제를 사실상 지배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재계 1위 삼성그룹은 단독으로 331조8천억원의 매출을 기록, GDP의 13%를 차지하며 한국 경제의 핵심 동력임을 입증했다. 현대자동차그룹(279조8천억원, 11%), SK그룹(205조9천억원, 8.1%)이 그 뒤를 이었다.
이 같은 대기업의 매출 집중은 코로나19 이후 더욱 두드러졌다. 2018년 70.9%였던 대기업 매출의 GDP 대비 비중은 2020년 65.3%까지 하락했으나, 팬데믹을 거치며 대기업의 위기 대응력이 빛을 발하면서 2022년 85.2%로 치솟았다. 2023년에는 다소 하락했지만, 여전히 78.8%라는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한국 경제는 대기업이 상단을, 중소기업이 좁은 하단을 이루는 와인잔 형태를 띤다. 이는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발휘하는 동시에 구조적 취약성을 드러낸다.
대기업은 한국 경제의 든든한 버팀목이다. 삼성전자는 반도체와 스마트폰, SK하이닉스는 메모리 반도체, 현대자동차는 전기차 시장에서 세계적인 위상을 자랑한다. 이들의 막대한 자본과 R&D 투자는 기술 혁신을 이끌며 국가 경제의 생산성을 높인다. 코로나19와 같은 위기 상황에서 대기업은 글로벌 공급망을 활용해 안정적인 매출을 유지, 경제 충격을 흡수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와인잔의 좁은 하단은 중소기업의 고충을 보여준다. 대기업의 시장 지배력은 중소기업의 진입과 성장을 가로막는다. 대기업 매출이 GDP의 78.8%를 차지하는 반면, 중소기업의 기여도는 상대적으로 미미하다. 이는 임금 격차와 고용 불안으로 이어져 소득 양극화를 심화시킨다. 또한, 대기업 계열사 간 내부 거래는 공정 경쟁을 저해하며 중소기업의 판로를 좁힌다.
특히 삼성그룹의 GDP 13% 비중은 특정 대기업에 대한 과도한 의존도를 드러낸다. 삼성의 실적 부진이나 글로벌 리스크는 국가 경제에 직격탄이 될 수 있다. 이는 와인잔 경제의 근본적 취약성, 즉 ‘한 바구니에 너무 많은 계란’ 문제를 부각시킨다.
대기업의 경제 기여도는 부정할 수 없지만,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서는 와인잔의 하단을 넓혀야 한다. 정부는 중소기업의 R&D 지원, 판로 확대, 대기업과의 동반성장 모델을 강화해야 한다. 공정거래위원회의 대기업 집단 지정과 내부 거래 감시는 공정 경쟁을 촉진하는 첫걸음이다. 그러나 보다 적극적인 정책—예를 들어, 중소기업 전용 펀드 조성이나 세제 혜택 확대—가 필요하다.
한국 경제는 대기업의 글로벌 경쟁력으로 빛나지만, 중소기업의 취약성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5대 그룹이 GDP의 40%를 차지하는 현실은 와인잔 경제의 강점과 약점을 동시에 보여준다. 대기업의 혁신과 안정성을 유지하면서 중소기업의 성장을 뒷받침하는 균형 잡힌 정책이야말로 한국 경제의 다음 도약을 위한 열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