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유학·이민 박람회장 입구
2025년, 한국은 전례 없는 '부의 탈출'을 목격하고 있다. 올해 유동성 투자자산 100만 달러 이상을 보유한 고액 자산가(High-Net-Worth Individual·HNWI) 순유출 예상 규모는 약 2,400명으로, 지난해 대비 거의 두 배 가까이 급증했다. 이는 영국·중국·인도에 이어 전 세계 4위 수준이라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이다.
이탈의 배경으로는 과중한 상속·증여세 부담, 기업 지배구조 개선 유인 약화, 정치·사회적 불확실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한국의 법정 최고 상속세율 50%는 OECD 국가 중 일본(55%)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수준으로, 기업 승계와 자산 이전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가장 큰 부담 요인으로 꼽힌다.
이러한 시점에 10월 11~12일 양일간 서울 강남 코엑스에서 제58회 해외 유학·이민 박람회가 열리고 있다. 단순한 정보 교류의 장을 넘어, 이곳은 '부의 역류' 현상이 개인의 선택으로 구체화되는 현장이었다.
이번 박람회는 서울 코엑스 1층 A홀에서 10월 11일(토)부터 12일(일)까지 이틀간 진행된다. 해외 유학과 이민·투자 상담 부스가 함께 배치되어 있으며, 다수의 국가 대사관과 유학 기관, 투자이민 전문업체가 참여했다.
올해 박람회의 분위기는 예년과 자못 달랐다. 학부모들의 유학 상담보다 중년 이상의 관람객들이 투자 이민 부스 앞에 몰려 있는 모습이 눈에 띄게 많았다.
무게감 있는 질문들
이민·투자 상담 구역을 유심히 살펴보니, 상담객들의 질문 수준이 심상치 않았다. 단순히 "어느 나라 교육이 좋은가"를 묻는 수준을 넘어섰다.
"한국에 남는 게 과연 합리적인 선택인가?"
"상속세 부담을 줄이려면 어떤 국가를 택해야 하나?"
"미국 골드 비자나 특례 제도는 여전히 유효한가?"
"거주권과 시민권, 복수 국적을 활용한 전략은 어떻게 짜야 하나?"
상담 창구에는 세무·법률 전문가, 투자 이민 컨설턴트, 국제 자산관리 전문가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일부 부스 앞에서는 자산 규모가 큰 관람객들이 직접 문의하는 모습도 포착됐다. 30~40분간 진지하게 상담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특히 눈에 띄는 점은, 현재의 높은 환율조차 이들에게는 더 이상 큰 장벽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유학 비용은 부담되지만, 투자 이민이나 자산 이전 수준에서는 환율이 결정적 변수가 아니다"는 분위기가 현장을 지배했다. 즉, 돈이 있는 곳에서는 이미 '떠날 준비'가 구체화되고 있었다.
박람회장 안 미국의 골드카드(기부형 영주권)를 홍보하는 현수막
자본 유출의 내막: 고액 자산가들은 왜 대한민국을 부담스러워하는가?
박람회 현장에서 감지된 움직임은 통계로 드러난 거시적 흐름과 일치한다.
세제 부담과 기업 승계의 함정
한국의 상속·증여세율 50%는 OECD 최상위권에 속한다. 대기업 총수 일가조차 상속세 납부를 위해 수조 원대 현금을 마련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사례가 언론에 반복적으로 보도되고 있다.
문제는 단순히 세금이 높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높은 세율은 자녀 승계 전략, 법인 지배구조 설계, 사전 증여 계획 등을 복잡하게 만들고, 비용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시킨다. 결국 일부 자산가들은 '한국에 남아 모든 부담을 떠안느니, 해외 거주권을 확보한 뒤 자산을 분산시키는 편이 낫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제도로 열리는 문: 글로벌 조세 경쟁
글로벌 부의 이동은 단순한 '조세 피난처 경쟁'을 넘어 복수 거주권·국적·신탁·재단 등 다양한 법률 설계를 통해 세무와 거주 권한을 최적화하는 양상으로 진화하고 있다.
미국의 골드 비자 제도, 유럽 일부 국가의 정액과세 제도, UAE의 비과세 매력 등은 대표적인 유인 장치다. 이러한 제도적 매력은 단순히 높은 세율을 회피하려는 목적을 넘어, '더 나은 제도적 안정성'을 추구하게 만드는 강력한 동력이 된다.
비즈니스 생태계와 자본 순환의 균열
고액 자산가들은 단순한 부유층이 아니다. 그들 중 상당수는 기업가이자 벤처 투자자, 때로는 사회적 리더이기도 하다. 이들이 떠난다는 것은 금융 자산의 이탈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생산적 인재와 자본, 혁신 동력의 이동을 뜻한다.
이는 단기적으로는 국내 투자 감소로, 중장기적으로는 세수 기반 약화와 성장 동력 상실로 이어질 수 있다. 부의 유출은 곧 미래의 잠재력을 잃는 과정이기도 하다.
박람회는 리트머스 시험지였다
이번 박람회는 단순한 '유학·이민 정보 교류의 장'을 넘어섰다. 고액 자산가들의 움직임이 실제 상담 수요로 가시화되는 증거였다.
정부와 정책 입안자들이 통계 수치로만 주목하던 '부자 유출' 이슈가 이미 시민과 기업인의 일상적 고민으로 전이되고 있다는 방증이다. 현장의 체감 온도는 통계보다 훨씬 뜨거웠다.
강남 코엑스 박람회장의 상담 창구에서 오가고 있는 진지한 질문들은 대한민국이 지금 중대한 '기로'에 서 있음을 일깨운다.
자본과 인재가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시대, 국가의 선택지는 단순히 조세율 조정에 그치지 않는다. 혁신 역량 강화, 제도 안정성 확보, 기업가 정신 복원, 글로벌 경쟁력 회복이 모두 맞물려야 한다.
만약 정부가 단순히 세율을 낮춰 부유층을 붙잡으려는 시도만 한다면 이는 지속 가능한 해법이 아니라 임시 방편에 그칠 공산이 크다. 반대로 부의 유출을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방치한다면 장기적인 국가 경쟁력은 점점 더 침식될 것이다.
이번 박람회는 단순한 정보 교류의 장을 넘어서 한 국가가 '부의 흐름을 어떻게 끌어당기고, 어떻게 되돌릴 것인가'에 대한 정책적 전환점을 상징하는 장면이었다.